공주를 향하여 동학농민군 총진군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3-13 10:25:13
  • -
  • +
  • 인쇄
해월 최시형 평전

전봉준과 손병희 논산 소토산에서 합류

10월 12일 전봉준은 삼례의 대도소에 모인 4천여 명의 호남 우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해 가장 먼저 강경(江景)으로 진격했다. 강경은 금강의 두 줄기가 여산·논산을 거쳐 합쳐지는 전국 물산의 집산지였다. 전봉준은 부호들과 상인, 보부상이 많은 강경에서 군세를 강화하고 군량과 군비를 조달했다. 이어 전봉준은 여산(礪山)을 점령하고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은진(恩津)을 거쳐 15일 논산(論山)으로 진군했다.


해월은 10월 14일 청산 문바위골에서 항일전의 성공을 기원하는 출정 치성식(致誠式)을 거행했다. 그리고 손병희에게 ‘대통령기(大統領旗)’를 내리고 호서동학군을 이끌고 호남의 전봉준과 합세해 공주성을 치라고 명령했다. 해월의 명령이 끝나자마자 손병희는 곧장 전령을 은진 방면으로 보내 12일 삼례를 떠나 북상하고 있는 전봉준을 찾아가 항일연합전선의 뜻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송산포 동학농민군을 이끌어 청주성 전투와 괴산 전투를 치르고 온 손천민을 청산 문바위골의 대도소에 남게 하고, 별동대장 이종만으로 하여금 송산포를 이끌고 오일상의 문의포, 강건회의 회덕포 등 금강상류 일대의 동학군과 함께 회덕 지명장(芝明場)으로 돌아가 청주 진남영에 대적하게 했다.


손병희는 통령기를 받고 청산을 출발해 전봉준과 만나기 위해 논산으로 향했다. 드디어 10월 16일 논산의 노성 소토산(小土山, 현재 논산시 부창동 일대)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 동학농민군과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만났다. 교단의 허가 없이 일으킨 동학혁명으로 인해 호남과 호서의 갈등은 있었지만 항일이라는 큰 목적에 뜻을 두고 전체 동학농민군이 통합해 명실상부한 동학농민군으로 출범했다. 손병희와 전봉준은 형제의 의를 맺고 끝까지 일본에 항거할 뜻을 다졌다. 그리고 이들 연합부대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북상을 시작했다.


16일 동학농민군은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首) 이름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글을 보내 충의(忠義)의 입장으로 돌아와 항일(抗日) 대열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일본 침략자들이 군사를 출동하여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근심케 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 때 왜구가 쳐들어와 궁궐을 불태우고 군신을 욕보이며 백성을 살육했으니 천고에 잊을 수 없는 한이 되었다. … 초야의 필부도 울분을 참지 못하는데 조정대신들이 임금을 위협하고 일본군과 손을 잡아 백성을 해치려고 한다. … 크게 반성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동학군과 의(義)로써 함께 싸우다가 죽기를 바란다.

전봉준은 박제순에게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지 말고 힘을 합해 이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논산에서 며칠 머물며 병력을 늘리고 병참을 확충하면서 전・현직 관리들에게 항일투쟁에 동참할 것을 계속 호소했다. 각지에서 올라온 동학도들과 전봉준의 호소에 동참한 백성들로 인해 전봉준의 부대는 며칠 만에 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특이 이때 강경과 논산, 은진과 노성, 금산과 진산에서 동학농민군과 뜻을 함께하는 의인(義人)들이 대거 동참했다.

 

▲ 논산 명재 윤증 고택. 동학농민군이 북상하면서 윤증의 고택을 탐관오리의 집이라고 불태우려 하자 농민들이 윤증의 인물됨을 말하여 소실을 면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을 지나 논산의 소토산으로 향했다.

고종, 동학농민군 ‘주멸(誅滅)’ 명령

일제의 동학농민군 토벌 압박과 김홍집 내각의 동학농민군 토벌 방침을 전해 들은 고종은 9월 22일 교서를 통해 “처음 봉기가 봉건적 탐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점을 인정하였으나 이제는 양민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비도들이 일으킨 난, 패역”이라고 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고종은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귀화하지 않고 왕명을 거역한다면 모두 ‘주멸(誅滅, 죄인을 죽여 없앰)’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고종은 이날 순무사(巡撫使)였던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삼아 동학군 토벌을 지휘하게 했고,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에 호의적이었던 전라도관찰사 김학진을 해임했다. 이로써 전주화약을 통해 동학도와 그간의 원한을 풀고 서로 협력할 것을 합의했던 조정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없애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조정에서는 연이어 전라도의 지방관에게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직책을 수여해 본격적인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도록 했다. 9월 29일 의정부에서는 동학농민군과 대립하고 있던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 여산부사 유제관(柳濟寬)을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로 차하(差下)했고, 홍주목사 조재관(趙載觀), 진잠현감 이세경(李世卿)을 호서소모사(湖西召募使)로 차하했다. 또 영남의 경우는 창원부사 이종서(李鍾緖), 전 승지 정의묵(鄭宜默)을 소모사로 차하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시켰다.

 

▲ 동학농민군이 쓰던 담뱃갑. 동학농민군이 사용하던 담뱃갑으로 쇠로 만들어졌으며 뚜껑에는 길(吉)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군이 윤증의 집에 두고 간 이 담뱃갑은 후손들이 보관하다 백제전쟁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군의 무단 군용통신선 설치와 동학농민군의 저항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조선 정부가 병참선 건설을 거부하였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군용 전신선을 가설하는 병참선을 건설했다. 당시 벼가 자라고 있는 논 한가운데에 설치한 전봇대는 농사를 천하의 대업으로 알고 있는 농민들의 큰 반발을 가져왔다. 일본군은 이 병참선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 수비대를 설치했고 군사도로공사의 건설을 병행해 국토를 짓밟았다.


이렇게 일본의 병참선과 군사도로가 개설되자 동학농민군은 각지에서 일본의 병참선을 공격했다. 이는 호남의 동학농민군과는 관계없는 호서와 경기, 경상도의 동학농민군들이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동학농민군들과 일본의 첫 대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이 있었던 한 달 후인 8월경부터 일본군이 국권을 침해하면서 가설한 군용통신선을 절단하는 게릴라식의 항일전을 전개했다.


당시 경상도에서 항일투쟁을 펼칠 수 있었던 세력은 동학 조직뿐이었다. 동학도들은 항일의 일환으로 몰래 전신주를 쓰러뜨리거나 군용전선을 절단했다. 동학도들의 군용전선 절단 시도는 대구 인근과 상주 낙동 일대에서 여덟 차례나 성공했다. 청일전쟁을 치르는 일본군에게 전선 절단은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사건이었다. 각 병참부의 일본군 주둔병은 적극 대응할 것을 지시받는다. 일본군에게 적대하는 동학도를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동학농민군들이 일본군을 괴롭히자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조정에 압력을 가했다.

 

▲ 논산 소토산(小土山) 추정지. 호남과 호서의 동학농민군이 총집결한 곳으로 기록돼 있는 소토산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글자 뜻대로 ‘나지막한 흙 언덕’이라는 의미라고 이 지역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동학혁명에서 호남과 호서의 동학군이 만난 역사적인 곳이지만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학자들은 현장 답사를 통해 소토산이 논산시 부창동 일대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멸(討滅)’작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은 ‘토멸(討滅)’, 즉 무참하게 학살해 씨를 말리는 것이었다. 동학농민군 토멸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은 이른바 ‘삼로포위토멸작전(三路包圍討滅作戰)’이었다. 이 작전이 입안된 것은 동학농민군이 조선 정부는 물론 일본군과 일본 정부에 위협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인 동학농민군을 제거해준다는 명분으로 동학농민군을 토멸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에 있어서 조선을 차지하는 데 가장 큰 방해 세력이 동학농민군이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진압하려고 조선 정부에 압박을 가한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조정은 결국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의 백성을 외국군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하는 길을 선택해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9월 23일 외무대신 김윤식은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의 요청에 따라, 경상 감사에게 칙령을 내려 관군을 출정시키고 두세 명의 요원을 선발해 일본군과 함께 다니며 일을 주선하라는 전칙(電飭)을 내렸다. 이로써 일본의 요청에 따라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가 형성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동학농민군 토벌 계획인 ‘삼로포위토멸작전’은 정확하게는 1894년 9월 29일과 30일 양일간에 결정됐다. <남부병참감부 진중일지>에는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의 구체적인 입안 과정이 잘 드러난다. 이날 일본의 히로시마 대본영(大本營) 카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병참총감이 인천의 병참감에게 보낸 전보에 일본의 동학농민군 진압 방침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동학당에 대한 처치(處置)는 엄렬(嚴烈)함을 요한다. 향후(向後) 모조리 살육(殺戮)할 것.

카와카미는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할 것을 엄렬(嚴烈)하게 명령했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은 현장에서 즉시 시행됐다. 9월 29일 경상도 낙동 병참사령부의 이스카이(飛鳥井) 소좌는 상주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두 명을 생포해 조사했지만, 자신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자 이들을 참살해도 좋으냐고 질의했다. 인천의 병참감부에서는 ‘동학당 참살에 관해서는 귀관의 의견대로 실시하도록 할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이날 낙동 병참사령관이 충청도 보은 인근의 동학농민군이 각 병참부를 공격할 것이 확실하므로 이들을 모두 살육해도 되겠냐고 요청하자 인천의 병참감부에서는 충청도의 병참부와 협의해 처리하라고 했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에 대해 일본군은 철저히 참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현장에서는 이를 충실히 시행했다.


동학군 살육의 명령이 하달된 이튿날인 9월 30일에는 동학농민군 토멸부대인 ‘독립보병후비 제19대대’의 3개 중대를 파견한다는 내용이 역시 대본영에 의해 인천으로 하달됐다. 카와카미 병참총감이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다.

경성수비대(京城守備隊)는 (10월) 30일(음 10월 2일) 출발하는 배로 파견하고, 또 다른 3개 중대를 배가 준비되는 대로 인천을 향해 파견할 것이다.

이로써 일본군의 본격적인 동학농민군 토벌, 즉 토멸(討滅)이 시작됐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