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운동의 두 가지 과제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0-07-29 1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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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록

일제시기 울산지역 여성의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읽고 있다. 그들에게는 동시에 해결해야만 하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식민지 권력뿐 아니라 여성을 통제하는 남성 중심적 문화 권력에 맞서야 했다. 1920년대 울산지역 신문 기사 속에서 일제시기 여성이 가진 중첩된 문제와 이에 대항하는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병영청년회와 언양청년회 결성을 시작으로 1920년대 울산지역 19개 면(面) 중에 18개 면에서 청년운동 단체가 조직됐다. 이 중 울산면과 언양면에만 여자청년단체가 조직됐다. 1924년 1월에 언양여자청년회가 조직돼 여자야학회 안에서 설립총회를 개최했으며, 울산여자청년회는 1927년 4월 28일 울산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규칙을 정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1920년대 전반 청년단체는 주로 강연회를 개최하거나 야학을 운영하며 교육의 보급과 산업 발달에 힘썼다. 울산여자청년회도 여성들을 위한 강연회 및 좌담회를 열었고, 울산부인회와 여자청년회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주주가 돼 부인상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자들의 교육 및 사회활동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울산군 대현면 여천리 대현소년당에서 여자야학을 신설해 학생이 30명에 달했다. 그런데 같은 동리의 70세 노인 한학자가 일반 가정을 순방하며 여자교육의 불필요와 풍기문란에 대해 역설해 재학생이 반수나 격감하는 일이 있었다. 여성은 교육의 기회를 얻기는커녕 가정의 빈곤을 이유로 유곽에 팔려가기도 했다. 1925년 울산은 경남에서 통영 다음으로 탁주제조업자와 주조 수량이 많은 곳이었다. 울산은 일본인들의 어업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진 곳으로, 일본인 이주 어촌이 형성되고 직업을 찾는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을 상대하는 음식점, 유곽도 늘어났다. 특히 방어진은 전성기 때 인구가 3만 명, 요릿집이 20여 곳, 기생이 5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방어진은 번성했고, 요릿집에 손님은 넘쳐 났지만 그곳에 팔려간 여성들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1927년 3월, 방어진의 유곽에서 병이 든 기생에게 약도 주지 않고 굶긴 일본인 업자가 고소당한 사건이 있었다. 1929년 5월 신문에는 병영리의 한 여성이 2인조 사기단에게 속아서 술집에서 일하게 된 사건이 실려 있다. 1929년 7월에는 울산군 하상면 반구리 음식점 종업원인 21세 여성이 팔려 다니는 신세를 비관해 경주에서 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복합적인 차별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항하고, 단체를 조직하며 연대했던 그들의 활동이 더욱 치열하고 위대하게 보인다.


일제시기 조선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복합적인 차별의 문제에 놓여있었다. 여성, 어린이, 노인, 농민, 노동자 등 자신이 가진 속성에 따라 이중 삼중의 차별에 대해 두 배 세 배의 힘을 들여 저항해야 했다. 식민지배, 가부장제, 자본의 권력 등 중첩된 문제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들의 치열한 저항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잘 들리는 큰 목소리, 앞장서 잘 보이는 인물들의 항일운동에 주목하는 것뿐 아니라, 중첩된 차별에 저항한 다양한 주체들의 모습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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