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를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한 동학농민군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4-10 10: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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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김개남의 병력을 기다리며 재정비

효포 전투에서 7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동학농민군은 경천(敬川)으로 돌아와 재정비에 들어갔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경천으로 돌아온 날이 10월 26일이었고 다시 공주 점령을 위한 공격을 개시한 것이 11월 8일이었다. 경천에 주둔한 동학농민군의 급선무는 식량 문제였다. 추수를 끝내고 군량미를 확보했다고 하지만 3만여 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의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관군 및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은 매 끼니를 원활하게 보급받지 못했다.


또한 추위에 대한 대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경천에 머물렀던 시기는 양력으로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해당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엄습하는 추위에 동학농민군은 힘들어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군수 지원이 좋았지만, 동학농민군은 두툼한 솜옷을 갖추고 있는 인원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동학농민군은 9월에 기포할 때의 의복 그대로였다. 동학농민군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집결지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활활 불을 지피고’ 몸을 녹여야 했다. 적진을 살피는 파수꾼들도 불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야만 했다.


전봉준은 일단 경천점으로 물러나 공주를 점령하기 위한 정비에 나섰다. 먼저 탄약을 보급하고 부대를 정비해 보강했다. 전봉준은 병력 보강을 위해 김개남에게 8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인솔하고 경천으로 합류하라고 긴급히 통지했다. 전봉준이 경천에서 10여 일간이나 머물렀던 것은 동학농민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김개남의 부대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김개남 부대는 경천으로 집결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무려 12일간이나 김개남 부대를 기다렸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동학농민군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공주로 집결하는 일본군과 관군

동학당 토벌을 목적으로 미나미 코지로(南小四郞)가 지휘하는 독립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0월 6~7일 인천에 도착했다. 1894년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한 후비보병 19대대는 10월 17일부터 삼로(三路)로 나누어 서로분진대(2중대)는 진위(振威)현을 출발해 수원, 천안, 공주를 거쳐서 전주로 내려갔고, 중로분진대(대대본부 및 3중대)는 용인(龍仁)현을 출발해 죽산, 청주를 거쳐 성주로 갔다. 동로분진대(1중대)는 이천(利川)에서 출발해 동로(東路) 즉 병참선로를 따라 가흥, 충주, 문경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 동로분진대는 대구로 향하면서 왼쪽으로는 원주, 청풍, 오른쪽으로는 음성, 괴산을 엄밀히 수색하도록 했다.


전봉준이 경천에서 동학농민군을 재정비하고 있는 동안 동학군 토벌을 위해 파견된 일본군 독립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속속 공주로 집결했다. 아울러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지방의 동학농민군 진압에는 일본군 제18대대와 각지의 일본군 병참부 수비병들이 투입됐고, 그중 일부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제19대대의 보조 병력으로 투입됐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는 기존 일본군 병력의 보조와 지원을 받으며 동학농민군을 ‘수색토멸(搜索討滅)’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공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서로분진대(2중대)는 10월 22일경 공주에 입성했다. 서로분진대는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가 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가 공주로 집결하자 삼로로 움직이던 다른 분진대도 공주로 모이도록 명령했고, 관군도 이규태가 지휘하는 선봉진(先鋒陳)까지 공주에 도착해 동학농민군의 공주 점령을 저지하고자 방어막을 펼쳤다. 공주를 사이에 두고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군이 긴장감 속에 대치했다.

본격적인 공주 공방전

전봉준은 11월 8일 공주 점령을 위한 총공격을 단행했다. 동학농민군은 한겨울에 골짜기와 등성이를 타고 가면서 산 위를 올려다보며 공격해야 했다. 반대로 우세한 무기를 가진 관군과 일본군은 우금티와 능치 등 고지를 차지하고 내려다보며 동학농민군을 저지했다. 동학농민군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충청 감영에서는 일본군과 관군을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두 부대는 판치와 이인으로 나가 주둔하게 했고, 하나는 감영에 남아 있는 방식으로 서로 순환하며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 공주 공방전 배치도, <공산초비기>에 수록된 것을 정리했다. <공산초비기>는 동학혁명 당시 공주 전투에 참여했던 관군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아래에 전봉준이 주둔했던 경천이 보이고 그림 가운데 우금치(牛禁峙)가 보인다. 이 그림에는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한 관군의 배치가 잘 드러나 있다.


관군 선봉장이었던 이규태의 묘비명에는 “많은 적(동학농민군)들이 땅을 덮어 왔는데, 80여 리에 걸쳤고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휘하에서 모두 나가서 싸우기를 원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곳은 바로 양호의 요충지이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더욱이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가볍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감영에 편지를 보내 형세를 기다려서 병사를 뽑아 늘어세워 요충지를 세우게 하고, 동쪽으로 판치에서부터 서쪽으로 봉황산 아래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병사를 매복시켰다.”라고 적혀 있다. 이렇듯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대비했고, 매복을 해서 산 위로 올라오는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는 작전을 폈다. 동쪽의 판치에서 서쪽의 봉황산까지 관군은 위장 병사까지 배치해 동학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진 겨울이라 동학농민군은 몸을 숨길 수 없는 가운데 전투가 벌어졌다.

 
우금티를 넘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거셌다. 전투는 오후 두 시경에 시작됐다. 동학농민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공주 진격에 나섰다. 손병희가 지휘하는 일군은 논산에서 곧장 고개를 넘어 오실산(梧室山) 옆길을 따라 이인을 향해 공격해왔고,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노성현 뒷산과 경천 쪽에서 판치와 효포를 공격했다. 경천에서 판치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판치를 지키고 있던 구상조(具相祖)의 경리청병을 공주 쪽 산 위로 밀어붙이고 효포, 능치 일대의 산 위로 올라가 깃발을 꽂고 진세를 과시하며 관군과 대치했다. 이인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거세자 모리오 대위는 이인에 주둔하고 있던 성하영의 경리영병 280명을 우금치(牛禁峙)까지 후퇴시키며 공세를 펼쳤다.

 

▲ 우금티 고개.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동학농민군은 이 고개를 넘어 공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결국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혁명의 꿈이 꺾였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이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각지에서 출몰하자 모리오 대위가 일본군을 이끌고 와서 지원하며 맞섰고, 성하영과 함께 이인에 나가 진을 치고 있던 백락완은 동학농민군에 포위됐다가 저녁 늦게 포위망을 뚫고 감영으로 돌아왔다. 특히 우금티가 위급해지자 11월 8일 밤 모리오 대위는 우금티 옆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은 이날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꺾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공주성 안으로 철수했다. 농학농민군은 판치 공격과 이인 공격의 서전에서 승리했다.

 

▲ 우금티 고개의 동학혁명군위령탑, 1973년 11월 11일에 세웠다. 동학농민군이 우금티에서 물러난 11월 11일을 기려 탑을 세웠다. 11월 11일 매년 이곳에서 유족, 동학 단체, 천도교인들이 모여 위령식을 하고 있다.


우금티에서 무너지는 동학농민군

동학농민군은 다음날인 11월 9일에도 공주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계속했다. 공주만 점령하면 ‘구병입경 권귀진멸(驅兵入京 權貴盡滅)’의 꿈을 이룩하고 농민들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진압군은 우금티를 중심으로 밀집해 있었다. 우금티를 빼앗기면 바로 공주 감영이 점령당하기 때문에 관군과 일본군은 우금티를 지키는 데 집중했다.


이날 아침 동학농민군은 동쪽으로는 판치(板峙) 뒷산으로부터 서쪽으로는 봉황산(鳳凰山) 뒤 기슭까지 30~40리에 걸쳐 마치 병풍을 펴놓은 듯한 진세를 펼치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관군은 금학동(金鶴洞)에 통위영 대관 오창성(吳昌成)과 교장(敎長) 박상길(朴尙吉)을, 능치(陵峙)에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洪運燮), 구상조(具相祖), 대관 조병완(曹秉完), 이상덕(李相德) 등을, 효포 봉수대(孝浦 烽燧臺)에는 통위영 영관 장용진, 대관 신창희 등을, 우금티에는 성하영, 우금티 견준봉에는 8일 이인에서 동학농민군의 포위망에 포위돼 있다가 탈출해온 백락완을, 주봉에는 영장 이기동 등을 배치했다.


동학농민군은 11월 9일 오전 10시쯤 이인에서 우금티 방향과 오실 뒷산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했다. 이날 동학농민군이 공격해오지 관군은 “사시(巳時, 오전 9~11시)쯤부터 비로소 총을 쏘아 섬멸하였는데, 일본 병사가 앞의 봉우리 위세 진을 일렬로 벌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포를 수십 차례 쏘아 적을 많이 섬멸하자 감히 가까이 침범하지 못하였지만 아직도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은 형세”라고 하면서 미시(未時, 오후1~3시)쯤에 이르러서도 격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의 토벌은 일본군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오후 8시경까지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40~50차례나 펼쳤다.


<관보>에는 이날 우금티를 둘러싼 전투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시에 총을 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했다가 적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곧 또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발사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4・50차 하니 시체가 산에 가득 찼다.

우금티 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진지의 몇 미터 앞까지 전진해 일본군의 저지선과 진지를 돌파해 점령하려고 40~50차례나 공격하는 혈전을 전개한 치열한 전투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와 화력에 계속해 반격당하면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일본군의 장총은 5백 보의 거리를 자연발화식으로 사격하는 신식 총이었는데 동학농민군의 화승총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기관총과 대포로 공격하니 아무리 많은 인원의 동학농민군도 일본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을 섬뜩하게 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동학농민군의 전투 모습에 관군은 혀를 내둘렀다.

아아! 그들 비류(匪類, 동학농민군) 몇만 명의 무리가 40~50리를 두루 에워싸 길이 있으면 빼앗고 높은 봉우리는 다투어 차지하였다.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면 서쪽에서 따라 하고, 왼쪽에서 번쩍하다가 오른쪽에서 튀어나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왔다. 저들은 그 어떠한 의리이며 그 어떠한 담력인가. 그들의 행동을 말하려 하고 생각함에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

동학농민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우금티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취했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남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금티 전투의 실패로 동학농민군의 꿈도 좌절됐다.

 

▲ 송장배미. 공주 웅진동 곰내 어귀에 있는 용못을 일명 송장매미라고 부른다. 송장매미라는 이름은 우금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주민들은 송장매미에 동학농민군 18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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