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원세개)의 묘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3-06 10: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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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총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무한한 권력을 쥐게 되면 쉽게 타락한다. 중국 역사에서 평생 권력과 여자만 탐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완에 탁월했고 특히 중국의 전통 방식인 권모술수에 능했던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서진을 세운 사마염과, 1915년 중화제국의 초대 황제 홍헌제 위안스카이(원세개)를 꼽을 것이다.


후한제국이 멸망한 후, 위ㆍ촉ㆍ오 삼국정립의 형세를 무너뜨리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나라는 위나라를 뒤이은 진나라였다.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가 진왕을 칭한 후,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은 서기 265년 허수아비에 불과 했던 위나라의 황제 조환에게서 선양의 형식으로 나라를 넘겨받게 된다. 진무제 사마염은 위나라가 혈족들에게 권력을 나누지 않아 제후들의 반란에 무기력하게 멸망했던 역사를 교훈삼아 자신의 황족들을 제후왕으로 분봉했다.


이렇게 서진 왕조를 창립한 무제 사마염은 즉위 당시에는 검소한 기풍을 솔선수범하는 등 어진 정사를 실현시키려 노력했으나, 점차 사치와 방종에 빠져들어 1만 명의 미녀들을 후궁으로 둘 정도였다. 미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황제 자신도 어떤 여자를 골라야 할지 몰라 매일 밤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양이 발길을 멈추는 곳의 후궁 처소에 들러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황제의 사치가 이토록 극에 달하니 신하들도 황제의 음탕과 호사에 뒤질세라 경쟁하게 되면서 지배계급 전체가 부패와 사치한 생활에 젖어들게 되었다. 사마염이 죽자 각지에서 제후왕들이 이른바 ‘팔왕의 난’을 일으켜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고, 연이어 이민족들이 일으킨 ‘영가의 난’으로 결국 진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로써 중국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분열기, 피로써 피를 씻는 이른바 5호16국 시대가 도래하게 만든다.


이곳 하남성 출생으로 1859년에 태어난 위안스카이는 청년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지방에서 열리는 향시에서조차 두 번이나 낙방을 했고 어려서부터 글 읽는 것보다 나가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런 위안스카이에게 남이 흉내 내지 못하는 특출한 재주가 한 가지 있었다.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해 청년기뿐만 아니라 정치에 뛰어들면서는 평생 변치 않는 수많은 조력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무일푼 시절, 상하이에서 만난 어느 기녀는 그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주었고 평생 절개를 맹세했다.

 

 

 

이러한 위안스카이 인생에 대전환점이 찾아온다. 북양군 ‘오장경’의 눈에 띄어 하급 참모로 막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에게 정치적 발판이 된 ‘조선 파병’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당시 조선 조정은 임오군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고 난의 진행 과정에서 일본인이 살해된 것을 빌미로 일본 군대가 조선으로 진입하자 청나라도 군대를 파병하게 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힘을 겨루는 상황이 연출되자 위안스카이는 수완을 발휘해 일본을 본국으로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이때의 공훈으로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의 추천을 받아 조선 원정군 방어 사령관으로 승진하게 됐다.


그 후 12년 동안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머물면서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에 개입했고, 대원군 납치를 진두지휘했으며, ‘고종’ 폐위 책동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개혁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궁에 포를 겨누었다. 그가 스물세 살, 젊은 나이에 조선에 파병됐다가 청나라로 돌아갈 때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얻은 다음이었다.


그에게는 열 명의 아내와 32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열 명 의 아내 중 세 명은 조선 여인이었고 32명의 자식 중 15명은 조선 여인들의 소생이었다. 위안스카이에게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누구보다 컸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권모술수에도 능숙했다.


비운의 황제 광서제는 젊고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신하들에게 “짐은 중국과 백성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권력을 잃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광서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다룬 캉유웨이의 <일본변정고>를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애독했다. 광서제는 그때까지 초야에 묻혀 살던 캉유웨이를 발탁해 ‘변법자강운동’을 전개한다.


‘변법자강운동’이 시작된 1898년은 무술년이었기 때문에 ‘무술변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898년 6월 11일 유신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200여 편에 달하는 ‘명정국시조’가 발표된다. 그러나 무술변법은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 일본을 근대국가로 이끌었던 메이지 유신은 가장 먼저 막부를 뒤집어엎음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변혁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는데 광서제와 캉유웨이는 유신운동을 시작할 때, 청나라 보수세력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팔기의 정원을 축소시키고 과거제를 폐지할 경우 선비들의 반발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1898년 9월, 광서제는 위안스카이를 만난다. 당시 병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에게 파격적으로 정3품 벼슬을 하사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는 일본의 전임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하는 일을 그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청나라 보수파 관료들에게 이는 광서제가 군권을 장악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어 다른 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음모로 비쳐졌다. 관료들은 이를 서태후에게 밀고하게 된다.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눈치 챈 광서제는 위안스카이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리다가 북경을 떠나 천진으로 돌아가 사태를 관망한다. 1898년 9월 21일 이화원에서 부랴부랴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재빨리 정권을 탈취해 광서제를 연금시킨다.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위안스카이는 재빠르게 직례 총독 영록에게 달려가 광서제와 유신 일파가 자신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밀고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의 실패 이후, 궁지에 몰린 서태후는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캉유웨이, 량치차오의 입헌정치를 받아들여 ‘변법’을 실행한다. 1904년 6월, 서태후는 광서제와 캉유웨이를 제외하고 무술변법에 가담한 모든 죄인을 사면한다. 위안스카이도 이 기회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해외 유학파를 대거 등용해 민족 산업을 육성하고 철도도 부설한다. 과거 시험을 폐지하고 신신 학교를 세우는 한편, 지방자치를 비롯한 행정을 적극 개혁한다.


그가 편성한 신식 육군인 ‘북양육진’을 청나라에서 가장 강한 무장 부대로 성장시켜 순식간에 이홍장을 제치고 청나라 말기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1905년 서태후는 동서양 각국에서 입헌정치제도를 살펴보고 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입헌군주제 도입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이 사찰단의 경호 책임을 맡게 된다.


마침내 1906년 9월 1일, 서태후의 윤허를 얻은 광서제는 조서를 발표해 예비 입헌 방침을 선포한다. 이 조서가 발표되자 전 중국에서는 입헌제 도입을 경축하는 축하연이 벌어지고 기쁨으로 들썩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떠들썩한 분위기는 초상집으로 돌변했다. 예비 입헌 기간을 9년이나 연장한 데다, 만주족 집권자들과 개혁을 주도한 위안스카이 사이에 치열한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구별할 줄 알았고 처세에 능한 위안스카이는 굽히고 조용히 물러나 앉는다.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사망한 다음날 서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대다수 중국인들은 광서제 독살설을 믿고 있었는데, 2008년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광서제의 머리카락에서 치사량이 넘는 비소가 검출돼 광서제가 독살되었음을 확인했다. 광서제 독살의 배후는 서태후와 변법운동을 모반한 위안스카이 둘 중 하나인 것으로 중국 학계는 추측하고 있다.


광서제와 서태후의 연이은 죽음 이후,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위안스카이도 만주 귀족들의 핍박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향인 하남성 창덕에서 초겨울 낚시를 즐기고 있던 위안스키이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11년 10월 10일 쑨원의 지도를 받는 혁명파들에 의해 무창봉기가 일어났고, 병사들의 반란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에서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중국의 22개 성 중에서 17개 성이 연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무창봉기로 다급해진 황제와 만주 귀족들은 위안스카이의 원대복귀를 명령한다.


1911년 10월 말 무한에 온 위안스카이는 무창봉기의 지도자 리위안홍에게 화의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리위안홍은 답신에서 위안스카이에게 귀순을 권하면서 “혁명이 성공하면 총통으로 추천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를 기회로 여긴 위안스카이는 건성으로 전장터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 황급히 북경으로 향했다. 그의 복잡한 속내에는 ‘적을 키워 황제를 압박해 퇴위시킨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용솟음치는 시간에 혁명가 쑨원은 미국 콜로라도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 소용돌이를 까마득히 모른 채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캔자스로 가던 도중 신문에 난 중국혁명 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배를 타고 혁명 대표들이 모여 있는 상해에 도착한다. 쑨원이 상해에 도착한 지 나흘 만에 17개 성의 혁명 대표들은 투표를 통해 그를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던 군사력은 위안스카이가 보유한 북양군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12년 2월 12일 선통제 푸이는 정식으로 황제위에서 물러난다는 퇴위 조서를 발표했다. 선통제가 퇴위 조서를 발표한 다음날 쑨원은 임시 대총통 사임서를 제출했고 이어 그 다음날 위안스카이는 만장일치로 중화민국 제2대 임시 대총통에 당선됐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이름만 있고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원수 자리인 대총통에 취임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 권력을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은 정치적 경쟁자나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일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때 부상한 인물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법규 초안을 하룻밤 만에 완성시켰고 쑨원이 만든 동맹회를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는 데 성공한 젊고 유능한 쑹자오런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상하이 기차역에서 피격해 암살하는 등 자신의 정적들은 가차 없이 제거했고 대총통 종신제를 확립한다.

 

 


위안스카이는 그의 생애를 통해 모든 가능한 권력들과 협잡하거나 회유했다. 유신파가 득세할 때는 유신파에게, 공화주의자가 득세할 때는 서슴없이 공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위안스카이에게 국가의 발전이나 민족의 운명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때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을 갖춘 정치인으로 평가 받았지만 그는 이 무렵에 이르러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 동물로 전락했다.


1915년 8월,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기 위해 ‘주안회’라는 민간단체를 만들어 ‘복벽’(전제왕조정치 부활)을 꾀한다. 지방정부, 민간단체, 상회, 노동조합까지 다투어 나서 전제정치를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가운데 1915년 12월 20일,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의 초대 황제인 홍헌제로 등극한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가까운 동지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거나 총구를 겨누었고, 중국 전역에서 위안스카이와 북양군을 상대로 호국전쟁에 가담하는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한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즉위한지 83일 만에 군주제 폐지를 선언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중국 국민들의 원성을 뒤로한 채 세상과도 작별한다. 중국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한 사내가 역사의 뒤안길로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의 나이 58세, 젊다면 젊은 나이였다.


그의 시신은 하남성 안양에 안치돼 있다. 그의 묘역은 유명대로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 남군의 장군이자 대통령이었던 ‘그랜트’ 장군의 무덤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를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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