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은 후 10년 안에 장안에 주문 소리가 진동하리라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11-22 1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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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6월 2일 해월의 교수형이 집행

1898년 6월 1일 찬정법무대신 조병직(趙秉稷)은 판결서의 원안, 즉, 해월의 교형 등을 처결해 달라는 ‘최시형 등 공소상주안’을 고종에게 올렸다. 상주안을 받은 고종은 판결서의 원안대로 집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판결 다음 날 해월의 교수형이 확정됐다. 고종의 승인으로 형이 확정되자 고등재판소에서는 형 집행을 위해 6월 2일 정오경에 해월을 서소문 감옥에서 고등법원 감옥서(監獄署, 사형집행장)로 옮겼다. 고등법원 감옥서는 서울 종로구 수은동(授恩洞) 59번지로 조선 시대에는 좌포청이었다가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혁돼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단성사 극장 뒤편의 종로3가 지하철역 입구의 도로변이다. 이곳에 ‘최시형 순교터’라는 표지석이 있어 해월의 순교 장소임을 알려주고 있다.

 

▲ 최시형 순교터(종로3가 단성사 뒤편). ‘동학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지도하다가 순교(1898)한 터’라 적혀있다. 1898년 6월 1일 고종의 사형 집행 명령으로 이튿날인 6월 2일 오후 5시경에 고등법원 감옥서가 있던 이곳에서 해월이 참형됐다.


6월 2일 오후 5시에 해월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 처형 직전에 러시아 공사인 파블로프가 해월의 최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파블로프가 찍은 이 사진은 1909년 브세로프스키에 의해 <고려>라는 잡지에 실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독일어 설명이 돼있는 다른 사진도 전해져 당시 여러 기자가 해월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1863년 8월 14일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은 해월은 1898년 4월 5일 원주 송골에서 체포될 때까지 동학의 최고 지도자로 36년간 도바리 생활을 전전했다. 사람들에게 최보따리로 불렸던 해월은 동학의 정신이 실현되는,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는 사인여천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회(民會)인 교조신원운동과, 우리의 손으로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동학혁명으로 전개돼 우리 역사의 자주적 근대화를 이끌었다. 


1898년 6월 2일 해월이 처형당함으로써 오랜 개벽의 발걸음이 중단됐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손병희로 이어져 3.1 독립만세운동으로 나타났고,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의 자양분이 됐다. 해월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힘으로 자주적 근대화를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해월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10년 후에 주문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

형을 집행하기 전에 집행관은 해월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해월은 “나 죽은 10년 후에 주문 읽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라고 했다. 해월이 말한 장안은 서울을 뜻한다. 이 말은 해월 자신은 좌도난정률에 의해 처형되지만 죽은 후 10년 정도 지나면 동학이 정부로부터 공인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해월의 유언대로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고쳐 ‘대고천하(大告天下)’하고, 동학을 근대적인 종교체제로 탈바꿈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탄압에서 벗어났다. 해월이 유언한 10년이 되기 전에 서울 장안에서 크게 주문을 외울 수 있게 됐다. 손병희는 1906년 2월 서울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했다. 이로써 험난한 동학의 탄압 시대가 끝났다. 조선 정부에서도 1907년 7월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죄안(罪案)을 삭제했다. 수운과 해월에 대한 죄안 삭제는 동학에 대한 공인을 의미한다. 동학이 창도한 지 48년 만에 공인된 것이다.

해월의 시신 훼손

해월은 교수형이 집행된 후 시신이 훼손됐다. 교수형으로 순도한 해월의 시신은 고등법원 감옥서의 뒤뜰에 두었다. 당시는 사형을 당한 지 3일이 지나야 시신을 인도해 갈 수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 관군의 안성부대대((安城部大隊)의 참령(參領) 이선재(李善在)가 동학군에 의해 전사했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항상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던 중에 동학의 교주 해월이 사형 당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해월의 시신이 안치된 감옥서를 찾았다. 그는 한밤중에 감옥서의 담을 넘어 해월의 머리 뒷부분을 나무로 수차례 때려 시신이 훼손당했다. 


사형이 집행된 3일째 되는 6월 4일 감옥서에서는 해월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다가 묻었다. 해월의 시신을 내다 묻기만을 기다리던 이종훈은 그날 저녁으로 김준식과 함께 상여꾼 두 사람을 데리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광희문을 향해 시신 수습을 위해 내달렸다. 그런데 광희문에 거의 다다르니 감옥서의 포교 두목 민홍오가 지키고 있었다. 배가 나와 민배때기라는 별명을 가진 포교 두목이 광희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어 이종훈과 김준식은 깜짝 놀라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숨겨 상황을 살피다 다른 길로 선회했다.

눈물과 빗물로 범벅된 시신 수습 과정


두 사람과 상여꾼은 동대문으로 나가서 성 밖의 길로 돌아 다시 광희문 밖으로 향했다. 이들이 광희문 밖에 도착하자 어둠이 내려 캄캄한 밤이 됐다. 그런데 비까지 쏟아지자 광희문을 지키던 포졸들도 다 돌아가 광희문 밖에는 인적도 없어 네 사람만 남아 시신을 수습했다. 이종훈은 한밤중에 시신을 수습해야 했기 때문에 성안에서 준비한 쇠초롱 하나, 황초 다섯 개, 우산 하나, 베 한 필, 칠성판 하나를 가지고 김준식과 미리 약속했다. 이종훈은 묘지를 둘러보다 “동학괴수(東學魁首) 최시형(崔時亨)”이라 쓰인 말뚝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시신 수습을 시작했다. 


이종훈은 초롱과 우산을 김준식에게 들리고 상여꾼 두 사람을 데리고 흙을 걷어내 시신을 수습했다. 그런데 상여꾼 두 사람이 시체에 손에 닿는 것이 싫어서 흙 파는 괭이로 해월의 시신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이종훈이 “아! 안 돼 안 돼”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아무리 남의 시체라도 우리들이 돈을 주고 해주는 일인데 그리하면 못 쓴다. 너희 두 사람이 하체를 들라. 내가 상체를 들을 테니”하고 무덤 속에서 시신을 땅 위로 꺼내 놓고 보니 시신에는 못 쓰게 된 헌 요 한 겹이 감겨있을 뿐이었다.

송파 이상하의 산에 매장

이종훈은 해월의 시신을 말았던 헌 요를 끌러 무덤 속으로 던져 버리고 칠성판 위에 해월의 시신을 올려놓았다. 한밤중에 비가 쏟아져 정상적으로 시신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이종훈은 가져온 베를 가지고 해월의 시신을 여러 번 감았다. 이종훈이 베를 감으며 해월의 머리 부분을 만지자 머리 뒤쪽의 뼈가 크게 상해서 떨어져 나간 것을 발견하고 다시 맞추어 조심스럽게 감쌌다. 이종훈은 스승의 시신이 훼손된 데 분개해 눈물을 흘리며 해월의 시신을 수습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자신의 눈물이 더해져 이종훈은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해월의 시신을 수습한 후 이종훈은 상여꾼을 시켜 해월이 묻혀 있던 곳을 처음처럼 만들고 “동학괴수(東學魁首) 최시형(崔時亨)”이라는 팻말도 원래대로 꼽아 놓았다. 이종훈과 김준식은 상여꾼 두 사람을 데리고 해월의 시신을 운구했다. 비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서도 지체할 수 없어 길을 재촉했다. 이종훈 등은 밤새 길을 걸어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손병희와 사전에 약속한 광주(廣州) 송파(松坡)에 도착했다. 송파에는 손병희, 김연국, 박인호 등 여러 교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병희는 송파에 도인 이상하(李相夏)가 산을 가지고 소유하고 있어 사전에 해월의 묘를 쓰기로 약속을 받았다. 이렇게 해월은 송파 이상하의 뒷산에 묘소를 정하고 장례를 치렀다.
 

▲ 처형 직전의 해월의 사진(1). 참형 직전에 러시아의 파블로프에 의해 촬영돼 1909년 <고려>에 실린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뒤쪽에 ‘처교죄동학괴수최시형(處絞罪東學魁首崔時亨)’이라 적혀 있다. 사진 아래는 ‘Chai-See-Hung, Old Tong-Hak Leader, Awaiting Execution’으로 ‘최시형, 나이 많은 동학의 두목, 처형 대기’라는 뜻이다.


▲ 처형 직전의 해월 사진(2). 사진(1)과 손 모양이 다르다. 이 사진이 사진(1)과 같이 찍은 다른 사진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찍었는지는 알 수 없다. ‘A TONG-HAK CHIEFTAIN’은 ‘동학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특별했던 해월의 수감 생활

이종훈은 해월의 수감 생활에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했다. 첫째, 해월은 서소문 감옥에 있으면서 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일절 묻지 않았다. 해월은 이종훈과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가족이나 당신 몸에 관한 말은 별로 없고 다만 교단에 대한 걱정으로 일관했다. “너희들은 아무쪼록 잘들 믿어라. 잘만 믿으면 나는 이리 되더라도 우리도 눈앞으로 점점 더 잘 될 것이니, 주문 많이 읽고 잘만 믿으면 아무 염려할 바 없느니라”라는 이야기가 해월의 편지 요지였다. 


둘째, 해월은 자신의 몸이 병환으로 위중한 가운데서도 같이 갇혀 있는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마음으로 안타깝게 생각해 돈을 구해 떡을 만들어 여러 죄수에게 나눠 주었다. 이러한 해월의 모습에서 늘 세상과 사람을 걱정하던 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셋째, 해월이 순도한 날부터 장례 지내는 날까지 무참히도 장맛비가 많이 내려 해월의 순도를 하늘이 슬퍼하는 듯했다. “죽어가는 창생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다 썩어빠진 세상을 다시 새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38년 동안이나 그 진리를 전하며 노력하시던 거룩하신 목숨”이 끊어지는 시간에 천지신명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해월에게서 보통의 인간이 아닌 진리를 깨달아 한평생 끊임없이 실천하던 성인의 풍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송파에서 여주 천덕산으로 이장

지금 해월의 묘는 여주 천덕산에 있다. 이상하는 지신의 산에 해월의 묘를 쓰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상하가 관가의 지목을 염려해 해월의 묘를 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상하는 만일 자기 산에 해월의 묘가 있다는 것을 관에서 알면 집안이 망한다고 이장을 거듭 독촉했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해월의 묘를 이종훈이 기거하고 있던 실촌면 근처로 옮기기로 했다. 당시 이종훈은 실촌면 곤재(곤지암) 장터 부근인 사동(절골)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이종훈은 이웃 마을인 삼합리에 사는 결의형제인 윤 모 씨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에 있는 천덕산 자락으로 이장하기로 했다.


해월의 묘소 이장은 1900년 음력 3월 12일 이뤄졌다. 해월의 주요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박인호는 이날 밤 비가 오는 중에 상복을 차려입고 해월의 묘를 파서 유골을 수습했다. 박인호는 한밤중에 해월의 유해를 등에 지고 여주까지 이동했다. 중간에 경산 고개의 주막에서 박인호는 밤새 해월의 유해를 등에 진 채로 주막 처마 밑에서 읍하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새자 박인호는 부지런히 걸어 천덕산으로 향했다. 이렇게 박인호의 정성으로 수습된 유해를 3월 13일 손병희, 김연국, 이종훈 등 동학 교단의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새 묘지에 안장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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