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수필(말 타고 가면서 쓴 글)’-북진에서 영원성

문영 시인 / 기사승인 : 2020-06-17 10: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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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로 읽는 열하일기

‘장관론’의 무대 북진

‘일신수필’은 7월 15일에 신광녕에서 시작해 23일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으로 9일 동안의 기록이다. 여기서 신광녕은 북진이다. 그런데 <열하일기> 기행에서 견문을 먼저 말하고 소감(느낌)을 서술하는 순서와는 달리 ‘일신수필’에서는 학문을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 ‘일신수필 서’가 맨 앞에 놓였다. 그 글은 “한갓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이들과 학문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평생을 두고 애써도 미치지 못한 것이 학문의 세계가 아니겠는가”라고 시작된다. 


이어 7월 15일 날짜 또한 연암의 ‘장관론’이 먼저 나오고, 여정인 광녕과 의무려산에 대한 견문은 짤막하게 뒤에 서술했다. ‘장관론’은 당시 현실성 없는 ‘북벌론’에 사로잡힌 조선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이다. 삼류인사(하류층)로 자처하는 연암은 청나라의 장관, 즉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또 똥 부스러기에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을 대변하는 실학의 논리다. 연암의 ‘장관론’은 ‘북학파’의 핵심 내용이면서 열린 세계에 대한 열망과 변화를 촉구하는 명연설이다.

북진의 의무려산

의무려산은 만주어로 크고 아름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의무려산은 산의 높이(최고봉인 망해봉 867미터)보다 약 45킬로미터에 이른 산줄기와 50여 개에 이르는 산봉우리가 화려하면서 웅장하다. 봉우리와 계곡과 사이사이에 놓인 바위와 나무의 풍광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의무려산에서 보면 동쪽의 요하벌판과 서쪽의 평원, 앞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이다. 그래서 만주의 광활한 벌판을 달렸던 옛 유목민이나 10여 일을 벌판만 보며 걸어온 조선 사신 일행들은 의무려산에 대한 찬탄을 쏟아냈다. 의무려산 입구 문은 좌우 대칭 조형물이다. 문을 통과하면 향불을 피우고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비각이 있다. 비각 뒤가 산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입구인데 왼편에 건륭제의 친필 ‘의무려산’이란 글씨를 세로로 벽에 새겼다. 산문에서 올려다보니 바위에 성의 망루처럼 성벽을 두른 성채가 보인다. 백운관이라는 성채다. 곁에는 암자와 정자도 있다. 기묘한 봉우리와 바위들이 햇살 아래 빛난다. 산속에는 관음각을 비롯한 수많은 사찰과 도교 사원 등이 있지만 우리는 일정상 이곳에서 내려왔다. 다음에 북진에 온다면 의무려산을 답사하리라 다짐했다.


의무려산은 중국 황실에서는 삼천 년 전 주나라 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며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불교와 도교의 도량지였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구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부산(富山)’이 의무려산이다. 광개토대왕이 거란족을 치기 위해 이곳을 넘었다.
 

▲ 의무려산 입구


▲ 의무려산 입구 건륭제 친필
▲ 의무려산 전경
▲ 의무려산 백운관 성채

 

북진묘

북진묘는 의무려산 들어오는 길목에 있다. 연암이 말한 대로 평평한 들판에 몇 길의 둥근 언덕을 이뤄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거칠 곳 없는 곳에 위치했다. 북진묘는 중국 역대 제왕들이 의무려산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제사는 주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다든지 전란이나 재난이 있거나, 황제의 순방 경우에도 행했다. 

 

▲ 북진묘 어향전 앞 비석, 정전(뒤편 초록기와)


북진묘 입구에는 문이 다섯 개인 패루가 우뚝 서 있다. 패루의 지붕과 하단석은 옛것이지만 사각기둥과 조각을 새긴 벽면은 대리석으로 최근에 새로 건립한 듯했다. 패루 좌우편에 돌사자상은 옛 그대로다. 네 개의 사자상은 인간의 감정인 기쁨(喜)·성냄(怒)·슬픔(哀)·즐거움(樂)을 나타내고 있다. 패루를 지나면 세 개의 묘당 정문이 있고, 그 지붕 아래 벽면에는 큰 글씨로 ‘북진묘(北鎭廟)’라 쓰여 있다. 동쪽 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종루, 왼쪽에 고루가 놓인 신마문이 있다. 신마문을 지나면 넓은 뜰에 56점의 비석이 있는 어향전이다. 이 비림 가운데는 건륭제의 ‘성수분(聖水盆)’이라는 시 구절, “조선 사람들이 새긴 시구가 많으니/ 기자국 문화가 오늘까지 흘러왔네”를 새긴 비석이 있다. 북진묘를 찾는 사람은 한 번 확인해 볼 일이다. 어향전 내부는 ‘북진의무려산의 신’ 소상과 함께 좌우에 여러 신의 소상이 놓여있다. 사방 벽면에는 여러 군신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내부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지 칠이 벗겨진 벽화와 먼지가 쌓인 비석들이 지저분하게 방치돼 있다. 어항전 뒤가 연암이 말한 푸른 유리기와를 얹은 정전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정전의 기와는 초록색이다. 정전 뒤로는 갱의전·내향전·침전 등의 건물이 있다. 

 

▲ 북진묘 입구 패루


서편 전각문으로 나오니 뜰에는 명나라 장학인이 쓴 ‘보천석(補天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같은 바위 오른편에는 연암이 말한 ‘취병석(翠屛石)’ 대신에 ‘화운병(華雲屛)’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 이 바위에는 다른 사람이 새긴 시문이 있었는지 떼어낸 자리가 사각형으로 뚫려 있다. 바위 아랫부분에는 한 사람 정도가 기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이 아래를 지나가면 병이 낫는다 하여 ‘치병석(治病石)’이라 한다는데, 아마도 연암은 치병(治病)을 취병(翠屛)으로 잘못 안 듯하다. 아무든 많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면서 무병장수를 기원한다고 한다. 북진묘 여성 안내인은 치병석을 지나면서 아들 낳기를 소망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모두가 아이 낳을 생각지도 않는 마누라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그 소원을 빌면서 보천석 바위 아래로 기어 통과했다.
 

▲ 북진묘 입구 사자상


▲ 북진묘 신마문과 종루, 고루
▲ 북진묘 어향전 비림, 정전(뒤편 초록기와)
▲ 북진묘 어향전 북진의무려산신상
▲ 북진묘 보천석


북진시에서

북진시는 북진묘에서 동쪽으로 2.5킬로미터 거리다. 옛 광녕성이 오늘날 북진시 중심가다. 북진시는 다른 도시에 비해 과거의 풍광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연암이 ‘일신수필’ 7월 15일 자에 기록한, “구광녕성은 의무려산 밑에 있는데, 앞으로 큰 강이 열리고 강물을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으며, 쌍탑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에 못 미쳐 몇 마장 되는 곳에 큰 사당이 하나 있어 단청을 새로이 하여 찬란하게 눈에 든다. 광녕성 동문 밖 다리 머리에 새긴 공하(蚣????, 용의 아홉 마리 새끼 중 하나로 물을 좋아함)가 매우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였다. 겹문을 들어가서 거리를 지나노라니 점포들의 번화함이 요동만 못 하지 않다. 영원백 이성량의 패루가 성 북쪽에 있다”라고 한 기록 거의 그대로다. 원래 광녕성은 북쪽 내성과 남쪽 외성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현재 남쪽 외성은 서쪽 벽만 조금 남아있고, 나머지는 허물어지고 없다. 북쪽 외성에는 점장대와 이성량 패루가 뚜렷이 남아있다. 점장대는 광녕성의 고루다. 특히 요동지역을 방어한 공적으로 세운 이성량 패루는 조선사신 일행의 필수 관람지였다. 이성량은 조선인의 후손으로 명나라 신종 요동좌도독이 돼 여진족을 물리쳤다.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가 그의 휘하에 있었다. 이성량이 죽은 후 누루하치는 요동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공했다. 이성량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왔던 명나라 지휘관 이여송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성량 패루가 있는 거리가 북진시의 중심가로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처럼 차와 사람과 온갖 종류의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들끓는다. 백화점도 마트도 없던 우리나라 팔십 년대 중소도시의 시장을 보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유별난 것은 교통과 수송 수단이 갖가지 형태로 운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차는 물론 자전거, 오토바이 등을 실용적으로 개조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예를 들어 리어카에 짐과 사람을 싣고 가는 자전거 택시, 짐칸을 싣고 다니는 오토바이 택시, 나귀와 노새가 끌고 가는 수레, 삼륜구동 택시와 화물차 등등이 무질서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용되고 있다.


민초들의 자각에서 나온 실용성과 일상생활에서 바탕을 둔 유용성이 연암이 말한 ‘장관론’이라면 그런 장관이 북진 시장과 거리에 아직도 남아있다.

 

▲ 북진 이성량 패루


▲ 북진(광녕) 점장대
▲ 북진의 풍물 택시

 

대릉하와 금주를 거쳐 영원성으로

북진시를 출발해 여양 마을을 거쳐 과거 십삼산이라 불렀던 석산을 지나 대릉하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석산은 돌이 많이 나는 곳인지 일직선 도로를 따라 석재상이 늘어서 있다. 대릉하는 북진시를 지나 능해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대릉하교 앞에 차를 세운 우리는 옛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를 완전히 건너는 데 약 삼십 분 정도가 걸린다. 조선 사신들은 대릉하를 배로 건넜다. 특히 여름철에 대릉하를 건넌 사신들은 강물을 전쟁터에 비유했다. 실제로 대릉하부터 영원성까지는 명·청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구간이다. 금주와 송산·행산 그리고 영원성 전투는 일진일퇴의 격전 끝에 청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병자호란(1636년) 때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도 군사를 이곳에 파견했다. 당시 전쟁을 두고 연암은 “슬프다! 이곳은 숭정 경진년(1640년)과 신사년(1641년) 연간에 명나라와 청나라 군사들이 격전을 하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다. 벌써 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난리의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시방도 넉넉히 당년의 장렬한 격전의 자취를 생각할 수 있었다”(‘일신수필’ 7월 18일)라고 했다. 

 

▲ 대릉하
▲ 대릉하교

 

대릉하에서 차로 30여 분을 가면 소릉하가 흘러가는 금주시에 닿는다. 금주는 1641년부터 1643년 사이 청나라에 파병된 조선군대가 화기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곳이다. 명·청의 격전지였던 금주성의 옛 모습은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금주 박물관 백탑만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금주 박물관에서 고조선 유물인 비파형동검을 보고 나온 우리는 옛 연산역인 호로도시를 지나 영원성이 있는 흥성시를 향해 달렸다. 발해만 바다가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 금주박물관 백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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