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영, 한글 사용을 청하는 상소를 하다(1)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10-10 10:10:30
  • -
  • +
  • 인쇄
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1905년(고종 42년) 6월 6일, 의학교(醫學校) 초대 교장 지석영이 한글(국문) 사용을 청하는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렸다. “지금 세계 각 나라가 모두 자국(自國)의 문자를 자국에 사용하니, 자주(自主)의 의리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에 타국의 각종 문학(文學)을 모두 자국의 문자로 번역 출판하여 자국의 백성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주(五洲)의 모든 백성이 문자를 알고 시국에 통달하여 무럭무럭 날마다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통상(通商) 후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물어물하여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에만 매달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국문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개화를 주장하고 우두법을 배워 천연두의 위험으로부터 백성을 구한 바로 그 지석영이다.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우두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한 의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의학자인 동시에 한글학자였다. 이는 개화인으로 민중 계몽과 사랑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석영은 한글 신문 <독립신문>이 발행되기 전부터 한글로 책을 저술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한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천연두 치료를 위한 우두종법을 익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지석영, 우두법을 연구해 천연두를 물리치다

천연두는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가리지 않고 걸리면 누구나 죽을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었고, 살아나도 얼굴에 곰보 자국을 남기는 질병이었다. 천연두 치료에 관심이 많았던 지석영은 아버지의 친구 한의사 박영선이 일본에서 우두법을 배우고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가져온 것을 알고 배웠다. 1879년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운다. 이때 지석영은 일본인 거류민들의 한국어 사용 책인 <인어대방(隣語大方)>의 교정을 하다가 국문법의 원리를 깨치고 이해하게 됐다. 결국 지석영의 종두법 공부가 국문(한글)공부로 자연 연결된 것이다. 이는 민중의 질병 치유와 민중의 교육이 동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다. 지석영은 훗날 이 순간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의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를 했을 때와 귀향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종두규칙’이 반포돼 종두 검진은 국민의 의무로 규정됐다. 지석영이 주도한 우두법 도입은 수많은 민중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주적인 근대 의료의 기틀이 됐다.
 

▲ 조선의 제너 지석영


선진문물 통한 개화, 미신타파 주장

1882년 지석영은 각종 외국 서적을 수집하고 연구시킬 것을 상소했는데 그는 일본을 통한 문물의 도입과 보급을 모색하자는 입장이었다. 1887년 3월 사회 전반에 대한 10개 항목의 개혁 상소문을 올린다. 그 골자는 국가재정의 운영, 국가기강과 사회풍속의 문란 등으로 나라와 백성이 피폐해졌으니 이를 바로 세우는 부국자강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웃 나라(일본)와 교린을 돈독히 하고 중화(중국)의 사모를 주장해 개화파 계열의 노선을 재확인시켰다. 


김홍집 내각(1895.12.17~1896.2.11)이 들어서면서 지석영은 형조참의와 승지를 거쳤다. 1894년 8월에는 백성의 마음을 치료하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때 미신보다 과학을 신봉하는 지석영은 “신령의 힘을 빙자해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을 두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어도 속이 시원치 않다고들 한다”며 쫓아내라는 상소를 올린다. 


진령군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으로 도망간 민비에게 50일 후 환궁한다는 예언을 했는데 예언이 맞아 진령군이란 작호를 받았다. 1895년 을미사변 때부터 민비 시해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최고 권력자와 결탁해 실세로 활동한 ‘최순실’이었다. 진령군은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친다고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2000봉에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얹기도 했다. 국고를 탕진할 정도로 궁궐과 밖에서 굿판을 벌였다. 지석영의 상소의 영향인지 민씨 척족과 무녀 진령군은 퇴출당했다.


종두 사업을 일선에서 이끌던 지석영이 1887년 국정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탓인지 우두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5년간 유배를 가야 했다. 유배 생활하는 동안 신지도의 극한 지역에서 농민의 빈궁한 삶을 목격하고서 민생과 보건 향상의 실천적 방도로서 농학서인 <중맥설(重麥說)>과 서양의학에 의거한 위생학서이자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新學新說)>을 저술했다. 특히 후자는 국문 전용으로 기술했는데,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국문은 민중의 각성과 근대 계몽에 유용한 표기 수단임을 자각하고, 국문을 본격적으로 연구 정리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했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해 의견을 발표했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1898년 3월 국민주권론과 국민참정권론을 주창해 자유민권사상을 계몽하고 보급을 주장하다가 풍천군 초도(椒島)에 11개월 동안 유배됐다.
 

▲ 우두 시술에 사용한 우두침과 유리판


동학 토포사체서 동래부사 된 지석영
통도사 바위에 이름을 남겼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지석영은 대구 판관으로 토포사가 돼 부산에서 들어온 일본군과 함께 경상도 남해지방의 농민군 토벌에 참여했다. 1894년 9월 26일 토포사 지석영은 대구 관아를 출발해 28일 부산항 감리서에 도착해서 일본 영사관을 찾아 토벌 방도를 상의했다. 29일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통영에 도착해 병력을 충원하고 10월 2일부터 고성, 사천, 진주, 남해, 하동 일대의 동학군 3000여 명을 일본군과 합동 작전으로 토벌했다. 10월 말경에 토포사 임무를 끝낸 지석영은 대구로 복귀했다. 진주목사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일본 총영사는 “지석영은 다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일본군 기타를 위하여 매우 유익한 인물”이기에 유임하기를 희망했다. 


1895년 지석영은 토벌의 공으로 동래부사와 동래관찰사가 됐고, 1896년에는 부산항재판소 판사를 겸임했다. 이 시기에 지석영은 통도사를 방문해 바위에 이름을 새겼다. 그의 이름은 손병희 바위와 김홍도 바위 사이에 있는 누운 바위에 크게 새겨져 있다. 


동래부사로 있을 때 일본 영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는 그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지석영이 “오늘날 약간이나마 러시아를 숭상하는 생각을 품고 몰래 일본배척을 주장하고 심지어는 공식 석상에서 ‘왜노(倭奴)에게 부동(符同)함은 마땅하지 않다’는 등의 언사를 내뱉고” 했다는 것이다.
 

▲ 통도사 지석영 이름 바위


 


지석영의 친일적 경향과 저항

1899년 3월 28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가 설치되자 지석영은 초대 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해 가르치게 했다. 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10년 사직했다. 지석영은 부산 제생병원에서 우두법을 배우고 일본에 수신사를 따라간 것 등을 고려한다면 일본어로 소통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동학 토포사로 활동할 때 일본군과 소통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과 관계 맺을수록 긍정만이 아닌 부정의 측면이 보였다.


1905년 11월 일본 동인회(同仁會) 회장 백작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의학교장 지석영을 고문으로 추천하고 청보성휘장(靑寶星徽章)을 보냈다. 동인회는 1904년 조선에 진출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보조한다는 목적에 따라 적극적인 조선 진출을 통해 통감부의 의료 정책을 지원한 단체였다. 총독부가 들어서자 폐지됐다.


1906년 11월 30일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기 위해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열린 1주기 추도식에서 지석영은 연설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전에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지석영은 활동한다. 1908년 지석영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실력의 부족으로 상실된 국권의 회복은 실력 양성에 있다며 대한자강회에서 적극 활동했다. 그는 외세 의존적 외교독립론을 배격하고, 자력에 의한 실력양성을 강조하는 자주적 자강독립론을 주장, 급진적인 무력투쟁론을 비판하고, 비폭력에 의한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점진적 자강독립론 입장에 있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국제사회에서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 여긴 것이다. 자강회원인 지석영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흡연의 해’라는 연제 강연을 했다. 대한자강회 평의원 3기 의장, 기호학회(畿湖學會)의 부회장, 국채보상연합회의소 부소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12월 12일 안중근에 의해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 추모식을 한자통일회(漢字統一會)에서 열었다. 한자통일회는 일본에 본부를 두고 일한청(日韓淸)의 한자를 통일해 문명을 이룬다는 목적에서 설립된 단체로 회장은 일본인 카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郞)였다.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유길준은 이토의 역사를, 이재곤은 개회 취지를 설명했다. 지석영은 추도문을 낭독하고 이완용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약 보름 뒤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한 사건에 연루된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가 혐의가 없어 석방되기도 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1910년 이전에는 지석영의 사회적 지위인 의학교 교장과 관계 있다. 이토의 추모문을 낭독한 것은 그의 삶에서 가장 오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친일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삶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은 훗날 역사적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시간 속의 사람은 그것을 알기 어렵다. 그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에 시류를 넘나들면서 살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시인, 울산민예총 고문, 역사문화 질문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