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도 계모임을 하였네(2)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07-31 1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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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사찰 중건을 위해 통도사 스님들 계모임을 하다

부도원에 있는 임자갑계원보사유공비(壬子甲契員補寺有功碑)는 1898(광무 2)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보사(補寺)란 사찰을 지원하는 것이다. 임자년(1852, 철종 3)생 계원의 보사에 대한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고인들을 법 받아 계를 모아서 임자갑계라 이름 지었네/ 정직하여 이끌어 관계없이 한결같이 위계와 나이를 귀하게 생각하네./ 차라리 그 사사로움은 뒤로 할지라도 힘 다해 보사를 먼저 생각하니/ 이에 돌에 표해두어 그 역사 없어지지 않게 하리라.” 

 

▲ 통도사 부도원에 있는 ‘무자갑계원보사 유공비’


그리고 비의 뒷면에는 갑장 현담 취영(玄潭聚暎), 성해 남거(聖海南居), 연봉 봉오 등 42명이 “금전 천 냥을 사중에 헌납하고, 공양답 30두지(마지기)를 대웅전에, 28두지를 관음전에 올립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계원 중 특히 천성이 청백하고 용모가 진중하며 위의가 엄정하고 자비가 초륜(超倫, 범상함을 뛰어 넘다)하며 수행에 전념하고 보사(補寺)에 진력(盡力)한 성해 남거(1854~1927) 스님은 근현대 통도사를 이끌어온 구하 천보(九河天輔, 1872~1965)스님과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스님의 은사다.


무오갑계원보사불망비(戊午甲契員補寺不忘碑)는 1905년 당시 총섭(總攝) 구고중학(九皐中鶴)이 중심이 돼 무오갑계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전면에 “슬프다, 공덕(功德)이 없어짐이여! 이제야 비로소 완전하다 함은 아니로되/ 온갖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니 인천세상의 안목(眼目 귀감)이로다./ 법해를 더욱 윤택케 하니 지혜광명이 다시 원만하여 지도다!/ 비석에 싣고 게송에 실어서 기나긴 세월에 널리 전하게 하리라”고 새겨놓았다. 비의 뒷면에는 보사 내용과 계원 명단, 그리고 시중질이 새겨져 있다. “금전 1천 냥을 사중에 헌납하고, 대웅전 공양답(供養畓) 30두지와 반두석함(飯頭石函 돌수각) 3좌(三座 1307냥)를 향각(香閣, 노전)에 올립니다.” 


계원은 갑장 원담 도수(阮潭度秀), 석담 유성(石潭有性), 해담 치익(海曇致益, 1862~1942) 등 40인이다. 석담 유정은 통합 조계종의 초대 종정(初代宗正)이었던 한암 중원(漢巖重遠, 1876~1951)선사의 법사(法師)였으며, 해담 치익은 율사로 수월 영민(水月永旻, 1817~1893)의 법을 잇고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7교정의 한 사람으로 추대됐던 분이다. 무오갑계가 기증한 돌수각이 현재 통도사 관음전 옆에 있다.

 

▲ 통도사 부도원의 ‘무오갑계원보사 불망비’. 비석 뒷면에는 계원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스님들의 계모임은 어떠했나?

통도사 무풍교에서 부도원까지 산재해 있는 갑계(甲契)는 10여 개다. 계는 친목 도모와 재산증식, 상호부조의 성격을 띠고 있는 공동체 모임이다. 이런 모임을 스님들도 했는데, 이것을 갑계라 한다. 갑계도 역시 친목 도모, 사찰보수, 사찰재산 증식의 목적으로 운영됐다. 계가 발생한 이유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운영이 어렵던 조선 후기의 사찰들이 각종 산채나 과일 등의 특산물 채취와 제지사업 등을 통해 운영 자금을 충당했으나 크게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느 정도 개인재산을 가진 스님들이 사찰 운영과 불교 중흥을 위해 조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갑계는 경상도의 사찰인 범어사와 통도사에서 특히 성행했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속됐다.


먼저 계의 구성에 대해 알아보면, 통도사 갑계는 스님의 경우 자(子)년생에서 사(巳)년생까지, 오(午)년생에서 해(亥)년생까지 6년 주기로 갑계를 만들었다. 즉 임자(1852), 무오(1858), 갑자(1864), 경오(1870), 임오(1882), 무자(1888)로 병자(1876)를 제외하고 1852년생부터 1888년생까지 6년 터울로 갑계가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출가년 기준이 아닌, 비슷한 연령의 스님들로 구성된 동갑계로 볼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는 출생년인 병인년(1866)과 경인년(1890)을 중심으로 구성된 듯 보인다. 


계원의 수는 부도원의 스님들 모임인 무오갑계와 임자갑계는 40명과 42명이며, 나머지 계는 인원을 알 수 없다. 일반인의 모임인 병인갑계와 경인갑계는 12명이고, 산수계는 32명이며, 너럭바위의 난국계는 무려 93명이다. 이로 보아 최소 10명을 기준으로 했으나 상한의 인원은 제한이 없고 동년배로 출가 시기가 비슷하고 뜻이 같으면 계원이 된 듯하다. 또 통도사는 6년마다 갑계가 구성된 것으로 보아 당시 통도사 스님들의 수가 절대 적지 않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계의 임원에 대해 통도사 부도원의 갑계에 보면 갑장(甲長)이 있지만, 다른 임원의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갑장은 선행된 갑계의 경험자로 계를 조직 운영한 경험이 있으므로 계 존속의 어려움 등 자문 역할을 한 스님으로 여겨진다. 또 같은 연령의 사람을 갑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갑장을 갑계 구성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 계의 원금관리와 대여 및 이자 증식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소임(所任)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계의 금액은 다달이 곗돈을 내는 형식이 아니라 계 발족 때 일시에 납부했다. 계원이 되는 이들이 얼마씩의 입계금(入稧金)을 내고, 또 절에서 받은 찬조금으로 기본금을 삼아 이자를 늘리기도 하고, 계원들의 공동노력으로 사중 공사를 맡아 생기는 소득을 계 자금에 넣어 기본금을 늘렸다. 계원들이 늙으면 땅을 사서 절에 바치고, 그밖에 필요한 불사(佛事)나 도구 따위를 곗돈으로 마련해 절에 비치하기도 했다.
 

▲ 무풍한송 길의 석등은 일제강점 때 개인이나 스님 사찰계의 보사로 만들어졌다.


무욕의 스님에게도 경제는 필요했다

무풍교 석축을 쌓을 당시(1922년)의 나이는 48세부터 64세까지였으며, 석등을 세울 당시(1937년)의 나이는 49세와 55세였다. 이로 보아 어느 정도 개인재산이 있던 50세 전후의 스님들 중심으로 갑계가 구성된 것 같다. 이는 당시의 스님들이 탁발과 기도, 그리고 사원 전답을 통한 재산의 증가 또는 생업을 통해 어느 정도의 개인재산 소유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갑계 활동이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했다는 것은 스님들의 동‧부동산 등 재산의 소유 또는 그들의 생업활동이 그것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스님들의 생활은 비참 그 자체였으며 스님들은 천민보다 대접을 못 받았고 스님 없는 빈 절이 허다했다. 지금은 번듯한 불국사도 조선 말기 사진을 보면 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만큼 사찰과 스님들의 경제는 궁핍했다. 아무튼 스님들은 탁발, 기도, 개간 등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전라도 스님들은 짚신 만들기, 목공, 종이 만들기 등을, 강원도 스님들은 품팔이를 했다. 통도사의 누룩 만들기는 경상남북 전역을 판매지역으로 해 그 공급을 담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스님들의 경제활동 결과, 사찰과 스님의 재산 형성에도 이바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계모임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스님들의 개인재산은 어떻게 사용했을까? 생존 중일 경우에는 보사에, 사후에는 사찰에 기증하고, 일부는 자신의 제사 비용을 위한 제위답(祭位畓)으로 사찰에 들여놓고, 나머지는 법손(法孫)에게 상속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 무풍교 석축비 근처에 있는 ‘무자갑계중’에서 보사한 석등


스님들이 계를 만든 목적은?

그렇다면, 계모임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통도사 임자갑계비와 무오갑계비에 있듯이 당시의 갑계원들은 헌답과 헌금을 통해 사찰의 재산을 증식해 불교 부흥을 도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계원들 간의 친목도 도모했을 것이다. 


이밖에 특정한 목적을 띤 계모임도 있었다. 동일한 문중의 승려들로 구성된 사종계(私宗契, 門中契)로 석등의 환성종계(喚惺宗契)와 서기직을 맡은 스님들로 구성된 서청계(書廳契)가 있었다. 입실한 스님들로 구성된 도종계(都宗契)는 무풍교 석축비의 본사 종계(宗契)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밖에 통도사에는 보이지 않지만, 부전직(副殿職)을 맡은 스님들로 구성된 어산계(魚山契), 장례시 상여를 매는 승려들로 구성된 판청계(判廳契), 상을 당했을 때 부조하는 상포계(喪布契, 등촉계燈燭契)가 있었다. 보사 중심의 갑계보다는 친목을 도모하는 작은 규모의 갑계라 하겠다. 


결국, 사찰계는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수행과 신앙심을 증진하거나 사찰 재산, 전각, 혹은 의식용품 등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조직체였다. 그러므로 사찰계는 추구하는 목적이 불교신앙으로 귀결됨으로써 일반 사회의 계가 지니는 단순한 이익집단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신앙 공동체적 요소를 전제로 성립된다. 활동 유형은 신앙활동으로서의 계와 보사활동으로서의 계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쉽게 명확하게 분류되기는 어렵다. 아마 처음에는 신앙활동 중심이었다가 나중에 사찰재정의 궁핍 문제가 대두하면서 보사활동이 중심이 됐고 이를 또한 기록으로 남긴 것 같다. 


종교적인 신앙과 수행활동과 관련한 일반인의 계는 미타계, 지장계, 나한계, 칠성계, 열반계, 염불계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일반인의 계도 보사(補寺)와 관계가 있다.

무욕과 청빈의 불교적인 삶과 신앙 공동체

종교적 활동을 위해서는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무욕(無慾)의 종교라 하여 스님들도 생존을 위한 기본적 토대가 없다면, 나아가 사찰이 기본적 재산이 없다면 종교적 수행과 더불어 사회적 보시(布施, 베품)을 할 수 없다. 물론 지나친 물욕은 스님도 사찰도 욕망으로 인해 병들게 하고 결국은 고통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물질적 부는 필요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통도사에서 갑계의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통도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보사(補寺)와 납사(納寺)가 오늘날의 통도사가 존재할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시절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마음으로 행했던 스님들의 계모임, 노작(勞作)활동과 신앙생활을 병행했던 그 시절의 신앙공동체로서의 불교를 통도사 갑계 이름바위를 보며 생각해본다. 오늘날 사찰은 부유하나, 스님은 여전히 무욕과 청빈의 신앙생활이 필요하다.


이병길 시인, 울산민예총 감사, 역사문화 질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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