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을 추모하거나 죽은 자들이 묻힌 곳을 돌아보는 여행지, 난징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6-07 1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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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다리 위는 경치를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난징장강대교’에서 바라보는 장강의 물살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납게 흘러간다. 옛날부터 중국의 강은 이익보다 재난을 가져다주는 무서운 강이었다. 특히 황허와 회하, 장강의 중하류 지역은 자주 물이 범람해 제방을 무너뜨렸고 100년 주기로 물길을 바꾸어 새로운 강을 만들었다. 이렇게 대홍수가 닥칠 때마다 어김없이 대참사가 빚어졌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거나, 재산과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어 대륙을 떠돌았다. 갈 곳 잃은 사람들은 화적떼로 돌변했고 중국 전 지역에서는 들불처럼 민란이 들끓었다.

 

▲ 난징장강대교


또한 중국의 강은 사체 유기장으로도 이용돼왔다. 중국의 농민들은 아기를 낳으면 성별을 구분해 태어난 여자아이는 곧바로 목을 졸라 죽인 후 강물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생산력이 낮았던 고대 시대부터 묵인해 왔던 일로 근세 초기까지 이어졌다. 여자아이는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따라서 중국 사회는 남녀 성 대비 항시 20% 정도 여성이 부족했다. 1920년대 상하이의 황포강에는 영아살해 후 유기된 시신이 한 해에만 2만8000구씩 떠내려왔다.


난징(남경)이 있는 강소성은 절강성의 북쪽과 함께 강남으로 불리는 곳이다. ‘생선과 쌀의 땅’으로도 불렸는데, 강소성의 ‘소’자는 쌀과 생선을 상징하는 상형문자다. 난징은 온전히 장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에는 자금산이 있어서 다른 지역과 경계를 이룬다.


1968년에 개통한 ‘난징장강대교’는 복층으로 설계돼 있고 중국에서 가장 긴 다리다. 자동차가 달리는 위쪽 다리는 길이가 4500여 미터에 달하며, 아래쪽 다리는 총 길이가 6700여 미터다. 1960년대 중소분쟁으로 소련의 기술진이 모두 빠져나가면서 전적으로 중국의 기술력과 인력만으로 개통시켰다고 한다. 어마어마했을 당시 공사 규모를 생각하면 중국인들이 이 다리를 자랑스럽게 여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보공원’은 난징 장강대교를 볼 수 있는 곳이다.

 

▲ 남강장강대교기념관 안에 있는 모택동의 친필


1949년 4월 23일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중에 있는 난징을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펼치며 장강 도하 작전을 실행한다. 당시 제35군 부대의 돌격을 선봉으로 남경에 진입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도강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덩샤오핑의 솜씨다.

 

▲ 도강승리기념비. 덩샤오핑의 글씨다.


선입견 탓일까. 태평천국의 몰락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난징대학살과 같은 근대의 어두운 역사가 짙게 드리워진 탓인지, 난징에 들어서자 바람도 음산하게 느껴졌고, 따사로운 봄볕조차 무겁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난징은 중국 10개 왕조의 수도였다. 250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난징은 불과 100년 전까지 강남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강소성의 성도다. 난징은 도시의 명칭이 가장 많이 바뀌고 제일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금릉, 건업, 말릉, 건강, 강녕, 백하, 승주, 집경, 응천 등이 모두 난징을 일컫던 이름이다. 예로부터 풍수가들은 난징을 왕기가 서린 땅이라고 했다. BC 333년 초나라의 위왕은 난징 서쪽 석두산에 성을 쌓고 왕기를 누르려고 금을 묻었다. 금릉이라는 명칭은 이때 생겨났다. 진시황이 사용한 방법은 산언덕을 절단하는 것이었다. 왕기의 맥을 자르고자 산언덕을 끊어내고 이름도 말릉으로 고쳤다.


이렇게 위왕과 진시황이 난징의 왕기를 제거하고자 노력했지만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은 이곳을 자신이 세운 동오(266~280)의 수도로 삼는다. ‘동오’는 난징에 세워진 첫 번째 왕조가 되었다. 손권에게 이곳 말릉을 수도로 삼을 것을 권한 사람은 촉한의 유비였다. 유비는 형주를 빌리기 위해 손권을 찾아갔을 때 “진강과 경구는 장강이 바다에 들어가는 나팔의 입구에 속해 장강 하류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으니 말릉만 못하다”는 조언을 한다. 손권은 석두산에 석두성을 쌓았고 수도의 명칭을 건업으로 개명한다. 건업의 ‘업’은 ‘업을 세운다’는 뜻이다. 북쪽으로는 장강과 접하고 동·서·남쪽은 각각 자금산, 석두산, 우화대로 둘러싸인 이곳은 천연의 요새였다.


280년 동오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진의 사마염은 동오를 무너뜨리고 비로소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진나라는 전후반을 합쳐 156년간 지속됐는데 전반 52년 동안 수도를 낙양에 두었기 때문에 서진(265~316)이라 불렸고 후반 104년간은 건강(난징)에 수도를 두었기에 동진 (317~420)이라고 부른다. 동진은 난징에 세워진 두 번째 왕조가 되었다.


난징은 진나라(서진) 때까지 손권의 오나라가 쓰던 명칭대로 건업이라 불렸는데, 동진의 황제 사마업과 같은 이름을 피하기 위해 지명을 건강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북방에는 이미 후한시대부터 남하하여 한족과 함께 정착해 살고 있던 많은 유목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한족 왕조에 대한 무력 침략을 시작한다. 이른바 중국 역사상 가장 최악의 분열기로 일컬어지는 5호16국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5호16국시대’는 동전의 양면처럼 ‘위진남북조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 북방에서 5호16국이 서로 대치하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건강을 수도로 삼은 동진, 송, 제, 양, 진나라가 명멸해 갔다. 581년 수나라가 중국에 통일 왕조를 세우기 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은 오나라, 동진, 송, 제, 양, 진 여섯 왕조를 가리켜 ‘육조’라고 부른다. 난징은 ‘육조의 고도’다. 이후에도 난징은 5대10국 시절의 남당과 명나라, 태평천국과 국민당 정부에 이르기까지 수도로서 기능했다. 이 시대를 합쳐 난징을 ‘십조도회’라고도 부른다.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이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난징’이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경’자가 들어간 역대 수도 가운데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지키고 있는 곳은 난징과 베이징 두 곳뿐이다. 난징은 여러 왕조의 수도가 되기는 했지만 그 어느 왕조도 난징에서 길게 도읍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시황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기도 한다. 진시황은 여물을 썰 듯 산허리를 절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물이 도시를 관통하도록 해 왕기를 씻어내려 했다. 난징의 ‘어머니의 강’이라 불리는 ‘진회하’는 지금도 난징 시내 한복판을 흘러간다.

 

▲ 고루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큰북 하나뿐이다.


난징의 중심 번화가는 신지에커우(신가구) 거리다. 중심부인 중앙로는 로터리를 관통한다. 이 중앙로에는 1388년 세워진 고루가 있다. 고루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큰북 하나뿐이다. 고루의 북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종루가 나온다. 현재의 종루는 1899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조그만 2층 누각은 특이하게 뾰족한 지붕과 처마가 뒤집혀 있다. 탑을 둘러싸고 아담한 정원과 찻집이 있다.

 

▲ 난징의 중심 번화가는 신지에커우(신가구) 거리를 관통하는 중앙로에는 1388년 세워진 고루가 있다.


봄이 오는 시기야말로 난징을 찾아오기에 그리고 난징을 추억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난징을 상징하는 산은 동쪽에 있는 자금산이다. 자금산은 불과 400m 높이의 작은 봉우리인데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10분이면 정상 어귀에 도착한다. 정상 약간 못미처 천문대가 있는데 흐릿한 난징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 자금산에는 주원장의 무덤인 효릉과 쑨원의 묘역, 중산릉이 있다. 손권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고 하는데 아직 묘역을 찾아내지 못했다. 주원장의 효릉과 쑨원의 중산릉 사이에 ‘동오대제 손권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일대가 자금산의 종산인 ‘매화산’이다. 매화산에는 매화나무가 3만5000그루나 심겨있다고 한다. 매화는 난징의 시화다. 차디찬 겨울을 이겨 내고 아직 봄이 오기 전에 꽃을 피우는 매화야말로 난징을 상징하기에는 제격이다.

 

▲ 매화산 매화


매화산에는 ‘관매헌’이라는 이름의 작은 정자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왕징웨이’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난징에서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고, 왕징웨이는 친일 정부를 이곳 난징에 수립했다. 난징웨이가 죽고, 훗날 난징을 수복한 장제스는 그의 무덤을 폭파시켰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매화산의 경치는 매우 아름답다. 해마다 2월 20일부터 3월 말까지 난징에서는 매화 축제가 열린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각각 카메라를 둘러매고 곳곳에서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댄다.

 

▲ 관매헌. 난징에 친일 정부를 세웠던 왕징웨이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난징을 수복한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무덤을 폭파시켰다.


중국이 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서구 열강들과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조약이 ‘난징조약’이다.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 체결 이후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이후 난징이라는 이름은 줄곧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중국은 2100만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배상금을 3년 안에 갚아야 했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했던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이 좌절되고 청나라 정부에 진압되기까지 총 2000만 명의 무고한 백성이 죽어 나갔다. 난징은 천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11년 동안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당시에 천경은 태평천국의 마지막 저항지로 수년간 청군에 의해 포위됐다. 천경은 1864년 끝내 함락되고 마는데 이때 공식 집계된 학살자의 수만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난징 한가운데를 흐르는 진회하에는 떠오른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1937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난징대학살’ 당시 30~40만 명의 난징 시민들이 희생됐다. 공산당과 국민당과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은 1928년부터 1937년,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난징은 국민당의 임시 수도였다. 이렇듯 난징은 아픈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다. 따라서 난징 기행은 아픈 역사를 상기하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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