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와 사해팔황의 중심 ‘중원’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3-13 09: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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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하남성 성도 정저우

 

 

하남성은 중국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중국 고대 국가의 도읍이었던 상나라의 정저우와 안양, 주나라의 마지막 도읍지 낙양을 비롯한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개봉)에 이르기까지 중국 8대 고도 가운데 네 곳이 이곳 하남성에 자리 잡고 있다.


정저우시는 현재 하남성의 성도다. 기원전 14세기 무렵, 상나라는 수도를 정저우로 이전했고, 정저우에는 현재까지도 당시에 쌓은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은 흙을 다져 10m 높이로 쌓았는데 그 길이가 7km에 달했다고 한다. 1만 명의 인력이 동원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쌓아도 무려 18년이 돼야 완공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하남성은 중국인들에게 ‘중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정학적 위치가 ‘천하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고 오랜 세월 역사, 문명, 정치의 중심이었다. 2015년 인구조사 기준으로 현재 상주인구가 9480만 명이다. 하남성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인 중원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래서 이들은 특유의 유명한 사투리를 쓴다. 일례로 OK라는 말은 중국어로 ‘커이’이다. 하지만 하남성에서는 ‘커이’라고 하지 않고 ‘쭝’이라고 표현한다. 가운데 ‘중’자는 중원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정저우시는 소문대로 전혀 볼 것이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도시들에 밀려 한참 낙후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도시는 깔끔하게 정비돼 있었고 인구도 6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옛날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전혀 고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1950년대 정저우시 부근에서 네 변의 길이가 총 7000여 미터에 달하는 산성이 발견됐다. 이를 흔히 ‘이리강 문화’라고 하는데, 이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제조장을 비롯해 많은 토기와 청동제품, 석기 등이 출토됐다. 이리강 유적은 대략 기원전 1600년경 상나라 초기 문명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상나라 때의 무덤도 발굴됐다. 사각형 무덤의 계단을 내려가면 청동 무기, 악기, 비단 등의 물건들과 함께 관이 묻혀 있는 방으로 연결된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내용에 따르면 거주 지역은 대부분 반지하였던 반면 중심부를 이루는 건물들은 사각형 모양으로 지상에 건축돼 있었다고 한다.

 


3500년 전, 상나라 시대의 성벽을 보기 위해 ‘정저우 상대 유적지’를 찾아갔다. 그러나 입구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철문에는 안내문조차 붙여놓지 않았고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듯, “쿵쾅”대는 기계 소리만 담장을 넘어 들려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하남성 박물관’을 찾아갔다. 하남성 박물관은 제법 규모가 컸고 평일인데도 끊임없이 방문객이 밀려들었다. 이곳에서는 하남성에서 발굴된 모든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는데, 특히 상나라, 주나라 시대에 제작된 청동기가 유명하다. 청동기는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었고, 기물 하나하나마다 개성이 달랐으며 느끼는 감동도 제각기 달랐다.


1959년 하남성 낙양에서 가까운 언사현 이리두에서 하나라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왕궁 유적이 발견됐고, 하나라(BC 2100~BC 1600)는 청동기를 제작한 최초의 국가였음이 밝혀졌다. 엄밀히 따지면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청동기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BC 4700년경 ‘앙소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사회에서 청동기는 정치권력의 상징으로, 제사에 사용하는 예기로, 또 재부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치며 청동기 제작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조사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제사에 사용하는 청동기는 그 자체가 권력이며 경제적 능력의 지표였고 신분의 기준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바라보면 청동기 중에서 지배계급의 신분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데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청동 ‘정(솥)’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을, 제후는 7개, 대부는 5개의 정을 사용한다’고 나와 있다. 정과 함께 곡식을 담거나 끓이는 데 사용하는 ‘궤’ 또한 신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수량을 엄격히 제한했다. 홀수의 정과 짝수의 궤가 짝을 이뤄 ‘천자는 9정8궤, 제후는 7정6궤’를 사용했다.


고대 중국에서 청동기 문명은,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해 찬란히 꽃피웠지만 유독 하남성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그 이유는 구리와 주석, 구리와 아연의 합금으로 만들어지는 청동기의 주요 성분인 주석의 주요 산지가 당시까지는 주로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상나라,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문양은 ‘수면문’일 것이다. 수면문에 대해 긴 세월 동안 청동기 연구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형태적으로는 소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았으며 표현방식은 인간의 마음속에 공포감과 신비감을 느끼도록 흉축한 괴수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청동기의 수면문이 공포감과 신비감을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인류학자들은 ‘고대사회에서는 정치권력을 성스러운 것으로 위장하여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규정하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수면문의 문양을 통해 부족이나 국가의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며 집단의 질서 유지와 통치 행위를 정당화시킨 것이다.

 

 


또한 상나라,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는 수면문을 주로 해 각종 동물 문양과 기하학적인 문양, 자연을 표현한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문양은 모두 대칭으로 배치돼 있어 권위와 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운뇌문’은 구름과 번개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가장 널리 오래도록 사용돼 왔고, ‘매미 문양’은 유충에서 성충인 매미로 죽지 않고 형태를 바꾸는 모습을 보고 불사의 몸으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아 사용해 왔다.


당시의 청동기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사용됐고 지배계급은 생활용구로도 사용했다. 일반 백성들은 청동기를 사용할 수 없었고 주로 토기나 목기, 석기 등을 사용했다. 역시 청동기 제작의 제일 큰 목적은 제사였다.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를 금문이라고 한다. 상나라 초기만 해도 한 개의 청동기에 한 글자 또는 몇 개의 글자 정도만 새긴 것들이 대종을 이뤘으나 후기로 가면서 글자 수가 늘어나 45자에 이르는 것도 있다. 상나라 초기에 새긴 문자는 그림문자라 할 수 있는 형태로서 ‘족휘’라고 칭한다.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대부분 종족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상나라 후기에는 그림문자가 갑골문과 유사한 형태로 닮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나라 때의 금문은 갑골문과 달리 당초부터 역사기록의 성격을 띠고 만들어졌다. 작게는 가족사부터 국가에서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금문은 기록이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청동기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창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마도 이것은 동서양을 통틀어 문자를 넣은 최초의 회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은 음주를 좋아해 술을 마시는 술잔이나 술통들을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주공은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과도한 음주문화를 경계했다. 작은 새를 뜻하는 ‘작’은 다리가 세 개고 위에는 기둥이 두 개 있는 술잔의 이름이다. 주둥이 부분이 새의 부리와 비슷하고 잔의 뒷부분은 새 꼬리와 비슷하다. 문자는 손잡이 쪽의 몸통 외부나 몸통 안쪽에 새겨 있다. 청동기에 주조된 글귀를 보면 문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대하는 숙연함이랄까, 경외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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