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조금 걸어도 좋은 춘설의 가지산

노진경 시민 시민기자 / 기사승인 : 2021-03-22 00: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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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산행

고헌산 자락의 논길이 멋진 조용한 마을로 이사를 했다. 마당과 텃밭이 있고 거실에서 탁 트인 숲과 하늘을 만날 수 있다. 하루의 시작이 급격히 변했다. 차로 30분 이동하는 대신, 물을 한 잔 마시고 텃밭으로 간다. 현관에서 텃밭까지 천천한 걸음으로 30초면 족하다. 매일 흙 위에서 초록의 생명들을 만나는 시간이 경이롭다. 

 

▲ 석남터널에서 오르는 가지산 등로

도시에서 잠자고 산촌에서 활동하는 삶이 때때로 혼란스러웠다. 특히 차가 막히는 퇴근 시간, 해지는 노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됐다. 최근 주거와 삶터가 일치되며, 혼란은 일순간 해소됐다. 복잡한 도시보다 산과 자연을 좋아하는 필자에겐 이상적인 삶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아도 안분지족을 넘어선 충만함이 있다. 

 

▲ 길을 걷다 잠시 멈추고 눈사람들 만들어 본다

하지만 이 충만함은 물리적인 조건이 충족된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 부쩍 늘어난 결이 비슷한 사람들과 관계의 영향이 더 크다. 산촌마을에 살아도 같이 일하고, 같이 논다. 무거운 일상부터 가벼운 일상까지 나눌 수 있는 또래들이 많아졌다. 


그 벗들과 함께 매화꽃잎이 비처럼 나리는 봄볕이 따스한 어느 날, 소풍을 가기로 했다. 소풍 전날은 머피의 법칙처럼 비가 왔다. 약속한 당일엔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지산 머리가 하얗다. 이럴 때는 산정에 눈님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소풍에 함께 하기로 한 벗들은 등산화도 아이젠도 갖지 않았다. 조건이 열악하다고 행위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고 싶다면 되어지는 만큼 애쓰지 않고 해보는 것을 택한다. 

 

▲ 소풍 일행 중 가장 어린 일곱 살 은율이와 아빠

 

▲ 눈 뭉치 던지기 놀이

 

▲ 산행을 함께한 벗들

눈을 만나기 위해 벗들과 가지산으로 향한다. 석남터널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한다. 굳이 힘차게 걷지 않아도 좋다. 소풍의 일행 중 가장 어린 일곱 살 아이의 걸음에 맞춘다. 다져진 눈의 미끄러움도 천천히 걸으니 문제가 아니다. 산에서 눈을 처음 본다는 아이의 웃음에 다 함께 미소 짓는다. 

 

▲ 길 위에 남기고 온 귀여운 눈사람

 

▲ 봄눈이 내려앉은 등산로

자박자박 눈을 밟으며 산을 오른다. 잠시 서서 눈사람도 만들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한다. 함께 하는 산행은 혼자일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길 위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 예전엔 혼자 힘차게 걸으며 머리를 비워내는 산행이 훨씬 좋았는데, 요즘은 천천하고 느긋한 걸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좋다. 

 

▲ 멋진 설경을 사진으로 남기는 중

탁 트인 경치를 만난다. 발아래로 저 멀리 이사 온 동네가 보인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보던 경치가 멀리서도 세세하게 보인다. 소나무와 바위가 멋진 그곳에 모두 멈춰가기로 했다. 바삐 걷던 때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곳이다. 누군가가 눈을 뭉치기 시작하고 눈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일곱 살 아이와 20대 청년이 눈덩이 멀리 던지기 놀이를 한다. 누가 이길지 결과가 빤하다. 하지만 청년이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니 즐거운 놀이가 된다. 두 사람의 모습에 다들 웃음이 터진다. 

 

다시 산하로 걸음을 돌린다. 굳이 정상에 닿아야만 산행을 한 것이 아니다. 과정이 충분하다면 이미 온전하다. 올라올 때도 미끄러웠던 그 길을 아이젠도 등산스틱도 없이 내려가는 우리를 지나가는 산객들이 걱정한다. 

 

▲ 고헌산과 가지산 사이로 보이는 상북면

 

▲ 탁 트인 경치에서 발아래로 내려다본 상북면

그들의 걱정하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 걱정이 우리 마음에 옮겨지지 않는다. 함께 천천히 걷기 때문이다. 서로 손 내어주며 기다려 준다. 가장 걸음이 느린 일곱 살 아이에게 우리의 속도를 맞춘다. 누구도 빨리 걷고 싶은 조바심이 없다. 이 따스하고 느슨한 평화가 새삼 감사하다. 일상에서도 천천하고 조금 걸은 이 산행을 떠올려보리라 마음에 깊이 새긴다. 


노진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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