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함과 화려함이 천하제일, 북송의 수도 카이펑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4-10 09: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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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넓은 하늘 아래 땅으로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었고 사방의 땅이 끝나는 곳까지 사는 사람들로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었다.”(시경)

 

 


‘카이펑’(개봉)은 도읍 주변에 높은 산조차 하나 없이 탁 트인 평지다. 그럼에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송나라 이전 중원이 혼돈에 빠져있던 5대10국 시절, 후량, 후진, 후당, 후한, 후주 모두 카이펑에 수도를 두었다. 나라의 중심인 수도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백성들이 안심하고 먹고살게 하는 일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치안과 안보다. 안보적 측면에서 보면 수도로서 카이펑의 위치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높은 산이나 천연의 장벽조차 없었고, 황허의 범람과 대홍수에는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하남성의 성도 정저우에서 북쪽으로 25km만 올라가면 황허가 나온다. 1938년 6월 9일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일본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정저우에 있는 황허의 제방 ‘화원구’를 터뜨렸다. 당시 일본군의 진입을 막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황허 하류 일대에서 무려 89만 명이 익사했고, 집을 잃거나 굶주려야 했던 이재민이 1250만 명 발생했다. 카이펑은 정저우에서 불과 80km 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때 직접 피해를 입었다.


카이펑의 가장 큰 특징은 내륙에 이르는 수로 운송망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카이펑의 인공 운하인 ‘변하’는 황하, 회하와 이어지는 수상교통의 요지였다. 경항대운하와 변하를 통해 남방의 풍부한 물자를 직접 공급받을 수 있었다.

 


 

카이펑이 송나라의 수도가 된 또 하나의 요인을 찾는다면 강남 지역에서 대규모 논이 개간되고 이모작 쌀 품종이 개발되면서 농민들이 잉여 농산물을 내다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운하를 통해 강남에서 운송된 다량의 곡물은 카이펑의 엄청난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북송 시기(960년~1127년) 카이펑의 인구는 100만 명이 넘어섰고, ‘부유함과 화려함이 천하제일’인 번영의 시대였다. 송나라의 경제적 번영을 몇 가지 수치로 환산하면, 당시 전 세계 국민총생산(GNP)의 60%를 차지했고 국내총생산(GDP)은 유럽의 5배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제력은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는 바탕이 되었다. 당시 ‘개봉부’는 정치의 중심이자 상업의 생생한 무대로서 번창했다. 카이펑은 관료와 군인을 주로 하고 상인을 포괄하는 일대 소비도시였다.


비단, 도자기, 종이, 의료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고, 인쇄술 덕분에 서적이 널리 유통돼 지식의 보급도 활발해졌다. 중국의 4대 발명품 가운데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바로 송나라 때 실용화되었다.

 


송대의 문화는 학술과 사상, 종교, 미술공예, 산업기술, 그 밖의 각 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이 문화는 전통적인 귀족 문화가 아니라 새 시대를 담당하게 된 관료와 사인층, 그리고 상업의 번영을 배경으로 한 서민층의 문화였다. 번루는 송나라 때 가장 번화했던 술집인 ‘백반루’를 가리킨다. 다섯 채 건물로 이루어진 3층 높이의 이 술집에서는 구름다리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었다. 백반루처럼 큰 술집을 ‘정점’이라 하고 작은 술집은 ‘각점’이라고 불렀는데, 카이펑 시내에는 정점 72곳, 각점은 무려 6400여 곳을 헤아렸다.


‘동경몽화록’에는 북송 말 카이펑의 번성한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당시 번화가를 ‘와자’라고 불렀는데 ‘동경문화록’에 의하면 카이펑에는 신문, 상가, 주가교, 주서, 보강문, 주북 6곳의 와자가 있었다.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 덕분에 우리는 카이펑의 모습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송나라 카이펑에서 살던 이들이 당나라 장안에서 살던 이들의 삶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108개 방으로 구성된 장안의 폐쇄적 구조가 카이펑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당나라 시기까지는 야간에는 성문과 방문, 시문이 모두 닫히고 큰 길은 일반 통행이 금지됐다. 그러던 것이 북송대에 이르면 방 제도는 완전히 붕괴돼 상점은 길거리로 진출했고 큰 거리에서는 점포를 열고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북송 때뿐만 아니라 남송대에 이르기까지 각 도시 어느 곳에나 상점들이 설치됐고, 거리를 따라 점포가 생기고 영업을 할 수 있었다. 통치의 편의성보다 경제적 실용성이야말로 송나라를 지배하는 원리였다. 야간영업 금지도 지켜지지 않았다.


인구밀도가 높았던 카이펑 시민들은 오밀조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늘상 화재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중국 최초의 소방조직인 ‘군수포’가 300보마다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카이펑 거주민들은 어디서든 장사를 할 수 있었고 야시장은 불야성을 이루었으며 가게와 술집 앞에는 채색 비단으로 장식한 간판이 내걸렸다. ‘구란’이라는 곳에서는 각종 공연이 펼쳐졌는데, 그중에는 수천 명을 수용할 정도의 넓은 공연장도 있었다고 한다. 구란에서는 잡극과 꼭두각시 등 여러 중류의 연예가 상연돼 카이펑 시민들은 이곳에서 해가 지는 것도 잊고 즐거움을 만끽하며 하루를 보냈다. 무지개가 걸린 듯하다고 해서 ‘홍교’로 명명된 다리 아래로 화물을 실은 배가 떠 있다. 다리 위에는 구경꾼과 행인들로 넘쳐난다.

 

 


‘송사’에 따르면 송나라는 사회적 취약층의 복지에도 힘을 기울였다. 과부와 노인, 장애인에게 식량을 지급했고 병자에게는 약을 주고 치료를 해주었으며, 죽은 자에게는 장사는 물론 천도제까지 치러주었다. 이에 소용되는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했다. 이렇게 송나라 백성들이 다른 시대보다 부유해지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국가권력의 절제’가 있었다. 송나라 황성의 규모는 당나라 황성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송나라가 존속하는 기간에 호화로운 궁궐을 짓거나, 궁궐터 때문에 백성들이 삶터를 철거당한 일은 없었다.


960년 거란족이 세운 강국 ‘요나라’가 남하한다는 소식이 ‘후주’에 전해졌다. 후주 조정에서는 ‘조광윤’에게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이 소식은 잘못 알려진 풍문에 불과했다. 이후 카이펑으로 돌아온 조광윤은 선양의 방식으로 황위를 차지했고 송나라를 세우게 된다.


조광윤이 특출났던 점은 왕조국가 시대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국 초기에 겪게 되는 ‘피의 숙청’을 거부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자신이 뒤엎은 왕조의 후손을 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 이 계율을 철저히 지키게 만들었다. 새롭게 즉위한 역대 송나라 황제들은 태묘에 들어가 석비에 적힌 태조의 비문을 읽으며 맹세를 했다고 한다.
‘첫째, 후주의 황제였던 시씨 자손들을 죽이지 않고 보전하며 죄가 있어도 벌주지 않는다. 둘째, 사대부와 나라를 위해 글을 올리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셋째, 농민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는다.’ 송태조 조광윤은 평상시 “이 왕조는 사대부들과 천하를 공유한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거의 유일한 사대부들의 낙원이었고 태평성대를 구가 할 수밖에 없었다.


개국공신을 토사구팽시킨 사례는 수없이 많았고 갖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한고조 유방이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건국 이후 개국공신들에 대한 편집증적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주원장은 개국공신들뿐만 아니라 구족까지 더해 10만 명씩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송태조 조광윤은 ‘배주석병권’으로 황권을 확실하게 다져 나갔다. 술자리를 만들어 허심탄회한 이야기와 “사람의 일생이란 짧은 것이오. 그저 즐겁게 보내는 것이 제일이지요. 제경들은 군사에서 손을 떼고 토지와 주택을 마련하고 매일 노래와 춤으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는 솔직한 말로 신하들의 병권을 내려놓게 만든 것이다.


조보는 송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송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여러 고관을 역임했고 재상 자리에 올랐다. 조보는 성격이 깊고 차분하며 굳세고 과단성 있었고 행정에도 밝은 현실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정을 무시하고 송태조에게 직언을 하는 일이 많았다. 절도사들에게서 민정권을 박탈하고 재정을 통제해 그 정병을 중앙으로 거두어들인 것도 바로 조보가 낸 방책이었다.


다음은 제위에 오른 송 태조 조광윤과 조보의 대화 내용이다. “당나라 말기부터 지난 수십 년간 천하는 전란이 끊인 적이 없었소. 어떻게 하면 제위를 오랫동안 내 수중에 둘 수 있겠오.” 조보가 대답했다. “전란이 끊이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군인의 병력이 임금보다 우위에 있는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의 태평을 유지하려면 군인의 손으로부터 권력을 박탈하여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병력과 재정, 곡물을 폐하의 손아귀에 넣는 일이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명나라 유준이 그린 ‘설야방보도’는 송태조 조광윤과 그의 공신인 조보, 그의 동생 진왕 조광의와 조보의 아내 네 명이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는 장면이 나온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늦은 밤, 조보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송태조가 변복을 하고 찾아 온 것이다. 잠시 후 송태조의 동생 조광의도 찾아왔다. 옆자리에 앉아 술을 따르거나 고기를 굽는 조보의 부인에게 조광윤은 “형수님도 이리 와서 한 잔 해유”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최고 권력자가 신하의 집까지 찾아가 국사를 논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광윤 그의 가슴에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위민정신’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분명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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