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깊이

강현숙 시인 / 기사승인 : 2019-09-04 09: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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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여름의 깊이는 관계의 깊이, 병적인 깊이이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방법에는 넓이 뛰기, 멀리뛰기, 높이뛰기와 같은 놀이와 같은 방식이 있으며, 그 관계에서 때로는 수평과 수직의 형식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멈춰버리기도 하면서 관계는 병적인 깊이를 가진다. 모든 깊이는 신화 속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처럼 서로간의 관계의 미로로부터 시작된다. 때로는 덧없음과 허망함 같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사람의 몸과 정신이라는 것이 완벽한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관념의 상태일 뿐이라 사람과 사람은 늘 병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 그 사람이 깊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이 여름을 보내며 이 관계의 깊이, 병적인 깊이에 천착한다.


내 여름의 깊이는 달빛 쏟아져 들어오는 열린 창가에 누워 잠을 청하며, 쏟아지는 달빛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달빛을 이불로 삼는 그 시간으로부터이다. 


시끌벅적하던 이들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 길가 평상에 누워 그 야생의 잠을 청하곤 했던 여름 한 밤, 밤이슬과 산 아래 동네로 불어오는 바람과 바로 맞대어 부비곤 했던 그 잠의 감촉으로부터 여름의 깊이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햇빛이 그 무엇에 의해서도 가려지지 않고 태양의 강렬함 그 자체로 원초적인 물질의 고향인 바다의 푸른 수면 바로 위로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의 하루, 그해 여름 바다 짙푸른 수면으로부터 여름의 깊이는 생겨났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 나, 내가 온 그 세계로부터 출발하는 원초적인 고향이 되는 그 곳이기에 여름은 그렇게 뜨겁도록 깊은 것이다.


여름은 나에게 있어서 일탈이다. 나는 여름에 나름의 의식을 치른다. 일상생활 속으로 다시 원초적인 몸으로 돌아가기 위한 의식을 행한다. 여름휴가도 그런 의식의 일부이다. 결혼을 하고 일가족을 이룬 우리는 남해 상주해수욕장으로 첫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 시절 아직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시외버스를 타고 둘째는 업고 한 손으로 큰 아들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수박을 들고 그렇게 휴가를 나섰다. 남편은 가족용 큰 텐트와 짐이 든 가방을 책임 진 채 그 해 여름 우리 작은 가족은 상주 바닷가로 여름휴가라는 명목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저녁부터 비가 내리더니 잠이 들 무렵엔 폭우가 쏟아졌다. 텐트 속으로 빗물이 들어 올까봐 남편은 밤새도록 텐트 주위로 물고랑을 파는 일을 했다. 아이들과 이룬 한 가족의 울타리가 되려 했던,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그는 그 이후로 이삼십 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원망할 적도 많았지만 나의 인생의 한 동반자였던 것이자 또 하나의 생명의 출발이 되어주기도 했던 그를 인정하는 것이 이 여름의 뜨거운 관계의 깊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깊이이자 이 여름의 깊이이자 우리의 인생에 깊이를 더하는 또 하나의 탄생을 이어나가는 일이다. 


여름의 깊이는 또한 진초록 풀들로부터 온다. 여름의 깊이는 자주달개비 파란 그 꽃의 신비로부터도 온다. 무엇보다도 여름의 깊이는 저 여름 하늘과 모든 것이 버티고 살아가는 대지와 맞닿은 포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내 여름의 깊이는 열린 문으로부터 들어온다. 내 여름의 깊이는 화강암 계단과 그 다음 계단 사이로부터 온다. 내 여름의 깊이는 한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강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질 무렵 풀 뜯어 먹는 소들의 느린 걸음으로부터도 왔다. 내 여름의 깊이는 그렇다. 안방 대청마루를 지나 흙마당을 질러가고 사랑방 문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다. 마당에 놓인 평상 위로 늘어진 감나무에 열린 초록 감들이 평상에 누운 나에게로 닿는 이 깊이이다. 향나무 가지들이 공중으로 뻗어가려는 성질과 은행나무 둥치가 굵어져가는 그 사이로, 붉은 동백 열매들이 단단하게 여물어질 무렵으로 여름은 파고든다.


이제 여름은 가고 없다. 그 사실로부터 솔직하고 성실한 여름의 깊이는 다시 시작한다. 깊이는 서로 연결되어 통하고 막힘이 없으며 살아있는 것들에게로 오는 여유이기도 하다. 이제 깊이에서 오는 그 여유로 모든 걸 너무 애써서 책임지려 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하찮은 선택을 하기도 하며 딱 맞는 상태라는 것이란 어차피 없을 테니 느슨한 선택을 하며 여름 가는 빛 따라 걸어가 보는 것이다. 몸과 정신이란 늘 병들어 있다는 것을 느긋하게 받아들이며 깊은 여름을 다시 한 번 떠나보내는 것이다. 


강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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