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 동해선 동래역

황주경 시인 / 기사승인 : 2019-06-12 09:51:55
  • -
  • +
  • 인쇄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전시비상대응체계는 제대로 작동되었을까? 1592년 4월 15일, 이 날은 이틀 전 부산진성을 함몰시킨 왜군이 동래성으로 몰려든 날이다. 이때 동래성 안에는 이미 제승방략, 지금으로 치면 전시작전계획에 따라 경상좌병사 이각,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합류했다. 이것은 양산과 울산 등지의 군사가 동래성에 합류하는 데 하루 정도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국 200여 년 동안 큰 전쟁이 없어 오합지졸이었다는 조선군의 방비태세를 달리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 옛 동래역 전면 전경

 

▲ 옛 동래역 전면 전경. 역사 뒤로 동해선 복선전철 고가 철도가 보인다.


동래역은 동해선에서 유일하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이라고 할 수 있다. 복선전철화 사업 이후 고가역으로 탈바꿈했지만 신역사 옆에 구역사를 그대로 남겼다. 옛 역사는 1934년 동해남부선 개통과 함께 지어졌다. 2016년 12월 30일 동해전철선 역으로 편입되기까지 약 8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목조단층, 석면 슬레이트 지붕으로 건축되었으며 정면과 배면에 별도의 박공을 갖는 맞배지붕으로 전체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구 역사는 폐쇄 직전까지 청량리, 강릉, 순천 등 주요 장거리 열차가 정차하던 역이었을 뿐 아니라 도시통근기능까지 훌륭히 수행했다. 연탄수요가 많을 때는 무연탄 취급역으로 연탄창으로 향하던 분기선이 나 있을 정도로 왕성한 영업력을 과시했다.


옛 동래역의 영화를 고스란히 지켜봤을 역전슈퍼 아주머니에 의하면 옛 동래역 앞에는 제법 큰 새벽시장도 열렸다. 시장 상인들은 주로 월내나 기장, 일광 등지에서 새벽 기차로 농.수산물을 운반해와 좌판을 펼친 아낙들이었다. 새벽 장이 서면 주변 식당이나 주민들이 싱싱한 장거리를 구하러 몰려나왔다. 성시를 이뤘던 새벽시장은 2012년에 폐쇄됐다.


그 옛날 일제강점기에는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울산, 남창, 좌천, 기장, 해운대, 수영 등지의 통학생들이 동래고, 동래여자고, 원예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동래역을 이용했다. 1940년 11월 23일, 민족 차별에 분노한 동래중, 부산2상학교 학생들이 ‘황성옛터’ ‘아리랑’ 등을 부르며 당시 일본군 육군대좌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는 일명 ‘노다이 사건’이 벌어진다. 이 저항운동으로 학생 15명이 일경에 체포되고 2명이 옥고를 치르다 숨지게 되는데, 당시 포승줄에 묶인 학생들이 동래역을 통해 부산진경찰서로 이송됐다.

송공단. 송공단은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임진왜란 당시 부사 송상현 공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제단이다. 송상현 공을 비롯한 임란 당시 순절한 여러 선열들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다. 동래읍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 매년 추념식을 거행한다. 송공단은 동, 서, 남, 북 4단으로 되어있으며 동단은 유생 문덕겸, 비장 송봉수, 김희수, 겸인 신여로, 서단에는 노개방의 부인, 송상현의 첩 금섬, 정발의 첩 애향, 남단에는 향리 송백, 부민 감상과 두촌녀 및 무명전망인,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이 모셔져 있다.
필자가 찾은 날, 제단 앞에서 묵념을 하고 돌아서는데 외삼문과 협문 사이 나무 위에서 다급한 까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보니 중년의 신사 한분이 큰 나무 아래 덤불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아저씨에 의하면 새끼 까치가 나무에서 떨어져 덤불 사이로 들어갔단다. 그리고 내게 외삼문 대들보 위에 올라선 고양이 두 마리를 가리킨다. 호시탐탐 까치를 노리는 녀석들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 송공단에 참배하러 와서 새끼까치를 구한 중년의 부산 신사


평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은 편이지만, 약 30여분 동안 까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는 아저씨의 구원병이 되기로 자청했다. 둘은 좀처럼 덤불 속에서 잡히지 않으려는 까치를 마주서서 한쪽으로 몰았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아저씨의 맨손에 어린 까치가 들게 되자 나무 위에 앉은 어미까치가 더욱 크게 울어댔다. 새끼까치가 알아듣든 말든 “까치야, 이제는 떨어지지 마라”는 당부와 함께 아저씨가 녀석을 나무위로 던져 올렸다. 퍼득퍼득 서툰 날갯짓으로 다행히 녀석이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 안착했다. 대들보 위 고양이 두 마리는 까치 쫓던 고양이 신세가 되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하는 표정으로 갸우뚱거리다 씁쓸히 사라졌다.


개선장군이 이런 기분일까? 뿌듯한 마음으로 아저씨께 악수를 청하며 혹여 송공단에 모셔진 분들의 후손인지를 물었다. 내 질문에 아저씨는,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왜군에게 송상현 부사는 죽는 자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라고 하며 동래성과 함께 운명을 함께 했다며 몇 백 년 전이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목숨으로 부산을 지킨 분이고 우리가 부산사람일진데 어찌 이 앞을 지나가면서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타관에서 왔다는 필자에게 송공단을 찾아주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는 총총히 외삼문을 나갔다. 짧지만 강렬한 추억을 함께한 의리의 부산 사나이, 그에게 송공단은 부산의 뿌리이자 부산의 정신 그 자체였다.

 

▲ 동래성 축소 모형도(수안역 전시관)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송공단에서 나와 걸어서 5분 거리인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을 찾았다. 지하철 계단을 따라 수안역으로 내려가면, 금방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전시관을 접할 수 있다. 박물관 정면에는 동래읍성을 축소한 모형이 자리 잡고 있는데 유심히 추정해보면, 성의 남쪽 망루 부근이 역사관이 자리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수안역 역사관은 2005년 7월부터 2008년 8월까지 두 차례 걸친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인골, 큰칼, 창 등 각종 출토유물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관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발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동래읍성 해자다.


동래읍성 해자는 성벽에서 약 30m 전방에 폭 5m, 높이 1.7~2.5m 정도의 돌과 흙으로 건축됐다. 당시 해자 안에는 물이 가득했을 것이다. 성을 접수한 왜군은 조선군과 백성을 도륙하고 주검을 성벽 아래 해자로 던졌다. 각종 칼, 화살촉 등의 전쟁유물과 함께 널브러진 유골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해자 발굴 때 뒤쪽에 구멍이 뚫린 남자의 두개골, 두 차례나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는 20대 여성 두개골, 총이나 활이 관통한 다섯 살가량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나왔다.

 

▲ 동래성안. 가야시대 고분군인 북천동 고분군

 

▲ 동래상 북문 전경


왜군 자료인 서정일기西征日記는 동래성 전투에서 참수 3000여 명, 포로 500여 명의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몇 시간의 전투로 벌어진 살육 현장으로는 너무나 참혹한 숫자다. 그날의 동래성은 아비규한 생지옥이었다.

 

▲ 동래성안 북천동 고분군 야외 전시관

 

▲ 수안역 임진왜란역사관 안 동래읍성 해자 재현관. 인골, 병기 등의 출토유물을 그대로 재현했다.


임란이 끝난 직후 상흔이 가시지 않은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맹하유감사孟夏有感詞 라는 제목의 시에 동래성 전투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4월 15일 새벽,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울려 퍼져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은 성이 왜적으로부터 피바다가 된 날이라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두 명이 생명을 보전하였고, 그 까닭에 술잔을 바치고 곡하는데, 아비는 그 아들을 곡하고, 아들은 아비를, 할아비는 손주를, 손주는 그 할아비를... 위해 곡하는데, 그나마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는 집은 다행이라고 했다.”

 

▲ 신구역사가 공존하는 동래역. 옛 역사 뒤로 모던한 신역사가 보인다.


유물관 유리벽 안, 원통한 주검을 맞았을 유골들을 눈앞에 마주하니 순간 필자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동래성 해자를 가득 매우고 진동했을 피비린내가 시대를 뛰어넘고 밀려와 멀미를 일으켰다.


수안역에서 나와 동래읍성 북문에 올랐다. 이곳에서는 동래부 동헌, 동래향교, 가야시대 고분군인 북천동 고분군 일대를 전망할 수 있다. 보물 제392호인 동래부순절도에는 1592년 4월 15일 문제의 그날이 잘 그려져 있다.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단좌하고 있는 송상현, 그는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혜보다 중요하다’라는 ‘절명시’를 고향의 부친에게 남기고 순국한다. 화면의 상단부에는 성이 함락직전임에도 부산 일대의 군사권을 가졌던 경상좌병사 이각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이 곳 북문을 통해 비겁하게 도망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 송공단 제단 전경. 송상현 공을 비롯해 임란 당시 순절한 여러 선열들을 모시고 있다.

 

▲ 동래부순절도(충렬사 복원본). 그림 상단 좌측, 동래성 북문을 통해 경상좌병사 이각이 도망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전시비상대응체계는 이각이 도망친 것 등을 빼고는 생각보다 잘 작동됐다. 민관군이 하나가 된 동래읍성 전투는 조선의 민심을 크게 흔들었고, 이는 전국 의병이 들고 일어난 계기가 된다.


한편,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쳐 망명 일보 직전이었던 선조는 전쟁 중에 임진왜란 최초의 패전지라는 이유로 동래를 부에서 현으로 격하시킨다.


황주경 시인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황주경 시인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