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연운16주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4-03 09: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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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10세기 동북아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은 거란의 흥기인데,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요동을 확고히 지배하기 위해 929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으로 남진을 시도한다.


이렇게 남하하는 거란과 대립하고 있던 ‘후당’의 하동 절도사(산서성 태원) 석경당은 거란과 결탁하고 자신을 거란의 신하로 낮추며 토지 할양을 약속한다. 석경당이 거란에게 할양을 약속한 중국의 땅 ‘연’은 중국 동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연운16주’였다.


연운16주는 오늘날의 하북.산서 북부에 해당하며 남북이 3400리, 동서 1천 리에 달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중원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석경당이 이 일대를 할양한 뒤부터 400년 동안 중원은 끊임없이 북방 민족의 침입과 위협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황하를 건너 낙양을 함락시키고 후당을 무너뜨린 거란은 석경당을 황제로 옹립하고 거란의 괴뢰정부인 ‘후진’을 세우게 된다. 연운16주를 거란에게 할양하고 매년 금 30만 근을 바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거란은 후진 영내에 거주하는 거란 상인이 피살된 것을 명분으로 다시 후진을 재침략해 수도 변경(카이펑, 하남성 개봉)을 함락하고 당시 후진의 황제 소제를 포로로 붙잡아 본국으로 데려간다.

 


 

한편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과 태종대에 이르러 송나라는 5대10국으로 분열된 중국을 하나씩 평정하면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성해 나간다. 그러나 송나라에게는 마치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넣는 것처럼 마지막 대업이 남아 있었다. 이민족 거란에게 빼앗긴 연운16주의 회복은 중국인들의 체면과 관계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화적 명분론에서도 결코 유보할 수 없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게다가 연운16주의 상실은 중국의 국토를 북적에게서 지키는 데도 전략적으로 큰 손실이었다. 북변 장산성 일대의 산맥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 중국을 방어하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반대로 거란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중국의 내지를 엿볼 수 있는 중요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연운16주의 회복을 위한 송나라와 지키려는 거란 사이에 10여 년간 공방이 계속됐다.


결국 송나라와 거란은 1004년 ‘전연의 맹’을 맺고 국경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대신 송나라는 형, 거란은 아우의 예로써 서로 교제하며 송나라는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거란에게 지원하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송과 요나라 사이에는 백여 년에 걸쳐 평화가 유지된다.


송의 휘종이 즉위했다. 방탕하게 생활한 휘종은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화북지방은 양산박 두령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든다. 이 무렵 강직함과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치던 여진족 완안 부족의 아골타는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서서히 거란족의 요나라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금’이라는 국호는 완안 부족의 근거지인 ‘아십하’(황금의 강)에서 유래한 것이다.

 


 

송나라는 새롭게 부상하는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공함으로써 숙원이었던 연운16주를 회복하려 한다. 송은 동맹의 조건으로 종래 요에게 지불하던 세폐를 금에게 증여할 것, 협공시 금은 만리장성을 넘어 화복 쪽으로 침입하지 않을 것, 동맹 후 요와는 화평을 체결하지 않을 것을 제시하였고, 금은 이를 수락한다. 


이어 연경(베이징) 공략은 송이 맡고 서경(낙양) 공략은 금이 맡되 서경은 장성 이남의 땅이니 점령하게 되면 송에게 할양하라는 제의를 한다. 아골타가 어떤 확답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에 대한 협공 논의가 급진전돼 양군은 대요 전쟁에 돌입한다. 금은 곧 서경을 함락시켰지만 송은 강남에서 ‘방랍의 난’이 일어나 대요 정벌을 위해 정비해둔 동관의 정예 부대를 난을 평정하는 데 동원한다. 환관 출신인 동관은 15만 대병을 이끌고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진압 과정에서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반란군과 백성을 살해했다고 한다. 겨우 난을 진압하고 동관이 대군을 휘몰아 북방으로 향했을 무렵에는 이미 연경을 제외한 연운16주의 대부분을 금나라 군대가 점령한 뒤였다. 요 상승군(발해인과 한인들로 구성)의 투항에 힘입어 송은 연경을 공략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패해 연경 회복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동관은 비밀리에 아골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곧바로 남하한 금군은 연경을 함락시킨다. 송은 맹약에 따라 금에게 연경의 할양을 요구했다. 하지만 금나라에 투항한 요의 한인들뿐 아니라 연경 성내에 거주하는 한인들까지 모두 금나라가 연경을 병합해 줄 것을 희망했다. 문화 수준이 낮은 금을 따르게 될 경우 자신들이 중용되거나 출세의 길이 더 열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골타는 연경을 송나라에 넘겨주고 전 100만 냥과 쌀 20만 석을 받는 조건으로 연경 성내에 거주하는 주민과 재물을 모두 북방으로 옮겨 간다.


한편 아골타의 아들 금 태종 ‘오걸매’는 1125년 산서성 북부로 진출해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거란은 태조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건국한 이래 9대 210년 만에 그 명맥이 끊겼다. 금 태종은 같은 해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연경과 운주 두 방면에서 송나라의 수도 변경을 기습했다. 연경을 지키던 곽약사는 버티지 못하고 금에게 항복했고 운주를 지키던 동관은 변경으로 도망친다.


금군의 대거 남하 소식에 놀란 송나라 휘종은 근왕병을 모집하는 한편 26세의 맏아들 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그러나 금군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휘종은 서둘러 강남의 진강으로 피신하였고 전 재상 채경도 일신의 안전만을 도모해 카이펑(개봉, 당시 명칭은 변경)을 빠져나온다. 주인을 잃은 카이펑은 함락의 순간이 가까워지자 강화를 제의하고 교섭 도중 금군이 마음을 놓고 있을 것으로 오판해 금군을 기습한다. 하지만 송군은 금에게 대패하였고 금나라가 제시한 가혹한 강화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건은 배상금으로 금 5백만 냥, 은 5천만 냥, 소와 말 1만 마리, 비단 1백만 필, 금의 황제를 백부로 받들 것, 하북의 요충지 20주를 할양할 것, 재상과 친왕 각 1명씩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화의가 성립되자 금군은 북변으로 철수했다. 금군이 철수하자 송에서는 이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된 책임자에 대한 처벌 요구가 높아졌고 결국 동관은 사형을 당했다. 채경은 80세의 나이로 유배지로 가는 중에 사망한다. 이렇게 되자 송나라는 주전파가 득세하게 돼 금나라와의 강화 조건을 위배하기 시작했고 금의 지배 하에 있던 거란족을 선동해 모반을 획책하게 된다.
금나라는 계속되는 송의 배신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로 밀고 들어오게 되고 마침내 11월에 카이펑은 함락된다. 금은 송왕조를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휘종, 흠종 황제를 비롯한 종실, 관료, 기예자등 수천 명을 인질로 잡아 북으로 끌고 갔다. 이것이 1127년 3월에 일어난 ‘정강의 변’이다.


이렇게 해서 북송은 태조 조광윤이 즉위한 이래 9대 임금 168년 만에 무너졌다. 역사는 이를 ‘북송’이라고 부르고 흠종의 동생인 강왕 조구가 강남으로 내려가 임안(항저우)을 수도로 정하고 송나라를 이으니 역사상 이를 ‘남송’이라고 한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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