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아설위(向我設位)의 혁명적 제사법 시행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9-20 09:4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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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음죽 앵산동(陰竹 鸎山洞)으로 이주

1897년을 상주 은척원에서 맞은 해월은 나이 71세의 노구였다. 동학혁명의 여파가 많이 가라앉았지만, 해월은 여전해 교도들에게 몸가짐을 신중히 하라고 당부했다. 한겨울에 은척원을 찾은 이병춘에게 “너희는 말을 경솔히 하지 말라. 나는 수년 후에 행할 일이라도 지금부터 생각해두노라”라고 했다. 해월은 평소 언행일치(言行一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말은 행할 것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한 것을 돌아보아 말과 행동을 한결같이 하라.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기면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고,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면 비록 해가 다 하고 세상이 꺼질지라도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해월의 언행일치 강조는 교도들 간의 신뢰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동학이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에 늘 강조했다. 해월은 비록 동학혁명이 끝난 지 몇 년 흘러 조정의 탄압이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일상적인 지목 아래에서 교인 간의 신뢰 회복은 교단 안정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해 2월에 해월은 상주 은척원을 떠나 음죽군 앵산동(현 경기도 이천시 설정면 수산1리)으로 이사했다. 은척원으로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리자 더는 머물기가 곤란했다. 음죽군은 충의포(忠義包)에서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어서 앵산동으로의 이주는 충의포의 대접주였던 손병희가 주선했다. 해월은 앵산동에 숨어지내면서 교도들에게 지목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은거지를 교도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두령(頭領)의 임첩任帖) 발행을 한동안 중지했다. 해월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경작(耕作)으로 업으로 삼아 천명을 기다리라”고 하며 지목을 대비해 생활에만 충실하라고 당부했다.
 

▲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1리 앵산동의 해월 최시형 선생비. 1897년 4월 5일 해월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향아설위의 제례법에 의거해 창도기념식을 거행했다. 이 비석은 수산1리 주민들이 해월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4년 12월 16일 마을만들기 사업 ‘앵산동 향아설위 이야기’의 하나로 건립했다.

홍기조(洪基兆) 등 평안도 도인 찾아

그러나 해월이 은거했다고 제자들이 앵산동을 찾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방법으로 해월의 은거지를 파악한 제자들은 해월을 찾아 왔다. 당시 해월을 찾은 대표적인 이들이 평안도 도인인 홍기조(洪基兆), 홍기억(洪基億), 임복언(林復彦)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평안도 용강(龍岡) 출신인 홍기조는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10월에 입도해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참전했다. 동학에 입도해 접주, 수접주, 대접주를 거쳐 1만 호(戶)를 지도하는 창의대령(彰義大領)을 역임하며 평안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성장한 홍기조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서명했다. 홍기억은 홍기조의 형으로 동생인 홍기조와 함께 평안도 동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해월은 당시 이들을 맞으면서 장차 우리 도의 운수가 북방으로 뻗어갈 것이라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해월은 이들에게 “너희들의 수련할 바는 오직 대성대천(大性大天)이요. 실행할 바는 오직 성경신(誠敬信)이니 일시적인 영고(榮枯, 성함과 쇠함)와 화복(禍福)은 흉중에 두지 마라”며 동학의 요체를 깨달아 나가라고 당부했다.
 

▲ 홍기조의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일제는 3.1운동 민족대표 등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자 인물 카드를 만들어 감시했다. 이 사진은 3.1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었다. 홍기조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동학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10월에 입도해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그는 1897년 2월 음죽군 앵산동(현 이천시 앵산리)으로 해월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대접주, 수접주, 의창대령 등의 직책을 맡아 평안도 동학과 천도교 활동을 주도하다 의암 손병희의 뜻에 따라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가 되었다.


마침내 시행한 향아설위의 제사법

해월은 이해 동학의 창도기념일인 4월 5일을 맞아 기념식의 방식을 전격적으로 바꾸었다. 해월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동학적 사유의 제사 방식은 유교적 제사 방식인 향벽설위(向壁設位)와 달리 향아설위로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도인들이 교의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시행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71세를 맞은 연로한 자신이 언제까지 교단을 이끌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항아설위의 방식으로 창도기념식을 거행했다. 해월은 향아설위의 이치를 묻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만 대에 이르도록 혈기(血氣)를 계승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心靈)은 한울님으로부터 몇만 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心告)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교훈(敎訓)과 남기신 사업(事業)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

해월은 당시 4대까지 치르는 제사와 20~30대의 조상에 대한 시향(時享)으로 이루어지는 유교의 제사법에 대해 “이십 대나 삼십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첫 조상이 있으리니 첫 조상의 영(靈)은 받들지 않느냐? 사람은 다 부모가 있으리니 부모로부터 처음 할아버지에게 거슬러 올라가면 첫 할아버지는 누가 능히 낳았겠느냐? 예로부터 한울이 모든 백성을 낳았다고 말하니, 첫 할아버지의 부모는 한울님이니라. 그러므로 한울을 모시고 한울을 받드는 것은 곧 첫 할아버지를 받드는 것이니 부모의 제사를 지낼 때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며, 시간은 정오(正午)에 베푸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하고 사람의 첫 조상인 한울님을 위하지 않는 한계를 지적하며 향아설위의 필요성을 말했다. 해월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시천주(侍天主)의 존재이니만큼 조상의 혈기가 나에게 전해져 있기 때문에 벽을 향하고 있는 신위(神位)를 나를 향해 돌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해월은 향아설위라는 제법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후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식고를 하는 방식이라고 그 방법을 제시했다. 해월의 제시한 향아설위는 제사라는 의례를 통해 인간과 신, 조상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혁명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앵산동의 향아설위 제례법 반포지 기념비.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앵산동에 해월 최시형의 향아설위 제례법을 반포한 기념으로 2004년 천도교에서 설립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

해월은 이 새로운 제례법인 향아설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식고(食告, 밥 먹을 때 행하는 심고)를 예로 들었다. 해월은 “너희들은 식고할 때에 한울님이 감응하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라고 한 제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제자가 답을 하지 못하자 “그러면 식고할 때 한울님이 감응하지 않은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제자가 아무 답을 내놓지 못하자 해월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사람은 다 모신 한울님의 영기(靈氣)로 사는 것이니, 사람의 먹고 싶어 하는 생각이 곧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마음이요, 먹고 싶은 기운이 곧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기운이요, 사람이 맛나게 먹는 것이 이것이 한울님이 감응하시는 정(情)이요, 사람이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한울님이 감응하시지 않는 이치니라. 사람이 모신 한울님의 영기가 있으면 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죽은 것이니라. 죽은 사람 입에 한 숟가락 밥을 넣어드리고 기다려도 능히 한 알 밥이라도 먹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한울님이 이미 사람의 몸 안에서 떠난 것이니라. 그러므로 능히 먹을 생각과 먹을 기운을 내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한울님이 능히 감응하시지 않는 이치니라.

사람이 음식을 접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한울님의 영기가 나에게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다름 아닌 시천주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해월은 향아설위를 하면 상기는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마음으로 백년상(百年喪)이 옳으니라. 천지부모(天地父母)를 위하는 식고(食告)가 마음의 백년상이니,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부모의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이 영세불망(永世不忘)이요, 천지부모 네 글자를 지키는 것이 만고사적(萬古事績)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니라”라고 하면서 앞으로 동학 교단에서는 향아설위의 제례법을 시행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물을 차리는 것과 상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 가지를 차리어 벌려 놓는 것이 정성(精誠)이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청수(淸水) 한 그릇이라도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옳으니라. 제물을 차릴 때에 값이 비싸고 싼 것을 말하지 말고, 물품이 많고 적은 것을 말하지 말라. 제사 지낼 시기에 이르러 흉한 빛을 보지 말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말고, 나쁜 말을 하지 말고, 서로 다투고 물건 빼앗기를 하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굴건과 제복이 필요치 않고 평상시에 입던 옷을 입더라도 지극한 정성이 옳으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굴건을 쓰고 제복을 입고라도, 그 부모의 뜻을 잊어버리고 주색(酒色)과 잡기(雜技) 판에 나들면, 어찌 가히 정성을 다했다고 말하겠는가.

해월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많이 차리고 형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수 한 그릇을 떠놓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조상과 부모의 유훈과 뜻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해월이 1897년 4월 5일 시작한 향아설위의 제법은 이후 의암 손병희를 통해 1900년대 초반에 동학 교단의 의식으로 공식화됐다. 천도교단에서는 손병희는 당시 향아설위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같은 날 여주 전거론의 임순호의 집에서 이 방식으로 창도기념식을 지냈다고 전한다. 향아설위를 통해 해월과 의암이 하나로 통한 것이다.

청수 한 그릇으로 충분한 제사

1900년대 들어와 동학의 교세는 서북지역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급팽창했고 이들이 향아설위의 제법에 적극 나섰다. 이 지역은 비교적 유교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해월이 향아설위를 시행했던 그 시대에 향아설위의 제사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독실한 동학교도라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교적 영향력이 약했고 동학의 포덕 열기가 강력했던 서북지역 동학도인들이 먼저 향아설위를 실천했고 천도교 시대에 들어오면서 향아설위의 제례법은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청수 한 그릇으로 지내는 향아설위의 제사법은 여전히 우리 시대 제례 문화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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