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의 동학농민군 전라도 북부 지역 장악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6-07 09: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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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무장포고 이전에 금산에서 기포한 동학도(東學徒)

무장에서 전봉준이 포고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동학혁명을 전개하기 전에 혁명의 불길을 올린 곳이 금산(錦山)과 진산(珍山)이다. 이 두 지역은 1914년 금산군으로 통합됐고 1963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충청도로 편입됐지만, 동학혁명 당시에는 전라도에 속해 있었다. 금산과 전라도 완주에 펼쳐진 대둔산에서는 동학혁명 최후의 격전이 벌어졌다. 동학혁명에서 가장 먼저 횃불을 들었고 또 가장 마지막까지 싸웠던 금산과 진산 일대 동학혁명과 대둔산 전투를 소개하면서 동학혁명의 대미를 장식하고자 한다.

 

▲ 금산군지도. 1871년 만들어진 <호남군지>에 수록돼 있다. 지도 중앙의 어사(御舍)로 표기된 동헌 등의 관아는 남북의 두 하천 사이에 있었다. 금산은 동학농민군과 보수층의 갈등이 심했다. 동학농민군은 2차 기포 시 금산관아를 불질렀다.


이 지역과 동학의 인연은 수운 최제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제우가 경주부의 탄압을 피해 남원 은적암에 있을 때 금산과 진산까지 가서 동학을 전했다. 수운이 경주로 돌아온 이후 이곳 도인들은 용담정을 찾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그러나 1864년 수운이 순도한 이후 이곳의 교세도 시들해졌다. 그러던 이 지역에 다시 동학을 전한 인물을 조재벽(趙在壁)이었다. 황간 출신으로 1887년 입도한 조재벽은 옥천, 청산, 영동 일대에 동학을 퍼뜨렸다. 이후 1890년에 들어와서는 금산(錦山)‧진산(珍山)‧고산(高山)‧용담(龍潭) 등지로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조재벽은 1982년 11월 전라도 삼례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해 교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듬해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 상소장 9명의 서명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교단 핵심으로 성장했다. 이후 보은의 교조신원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교단의 주요인물로 성장한 그에게 상주 왕실에 은거하던 해월은 숨어 있을 곳을 알아보라고 도움을 청했다. 조재벽은 청산 문바위골에 있는 자기 수하 김성원의 집을 안내했고 해월은 1893년 7월에 이사했다. 해월이 동학혁명의 9월 재기포를 선언한 곳이 바로 김성원의 집이었다. 동학혁명에서도 살아남은 그는 경암(敬菴)이라는 도호를 해월로부터 받아 활동하다 1897년 7월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보은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했던 동학도들은 교조 신원과 함께 폐정 개혁과 척왜양창의를 요구했다. 보은에 참여했던 동학도들은 귀향 후 금산지역에서도 폐정 개혁의 시행을 준비했다. 고부에서 전봉준이 기포했다는 소식을 접한 금산에서도 동학도들을 중심으로 기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봉준의 고부기포가 새 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해산했을 때, 금산지역의 동학도들은 무장 포고를 알리기 전인 3월 9일 이야면을 선봉장으로 기포를 감행했다.


금산의 동학도들이 기포한 곳은 제원(濟原)이었다. 제원은 금산읍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으로 제원도(濟原道)의 찰방역(察訪驛)이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금산군지>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진산의 동학농민군은 3월 7일 통문을 보내 9일 정오까지 제원역에 모이라고 했다. 9일 모인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은 수건을 두르고 몽둥이를 들고 금산읍으로 향했다. 다음날인 10일 동학도들은 관리의 부정행위를 입증하기 위한 실태조사에 들어가 금산군수에게 전세(田稅)와 대동(大同), 군전(軍錢), 호감(戶歛) 등과 관련한 문건을 요구했다.


군수 민영숙(閔泳肅)이 동학도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동학도들은 2명의 공형을 잡아 위협해 문건을 건네받았다. 동학도들은 문건을 확인해 부정행위 가담자들의 소재를 파악했다. 부정행위를 확인한 동학도들은 관에 강력한 압박을 가해 폐정 개혁을 요청하고자 각 면에 통문을 보내고 면민을 읍으로 모이게 했다. 12일 수천 명이 금산읍으로 몰려오자 읍민과 관원들은 놀랐다. 동학 지도부는 면민들에게 관의 앞잡이로 군민을 괴롭힌 호장 김원택의 집과 악질 보부상의 집을 부수게 했다. 그리고 10개 조의 폐정개혁안을 담은 소청안을 제출했다. 군수 민영숙이 폐정 개혁을 약속해 4일 만에 사태는 일단락됐다. 금산지역의 동학도들은 인근의 용담현까지 진출해 폐정 개혁을 요구했고 현령 오정선은 동학도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렇게 금산지역의 동학혁명이 시작되었다.

 

▲ 제원역(濟原驛) 자리에 만들어진 제원초등학교. 제원역은 제원도(濟原道)의 찰방역(察訪驛)으로 휘하에 무주의 소천역(所川驛), 용담의 달계역(達溪驛), 진안의 단령역(丹嶺驛), 고산의 옥포역(玉包驛) 등 4개 역을 관할했다.


보수층의 동학농민군 학살

금산지역 동학도들의 기포를 보고받은 정부는 전라감사에게 두 가지 수습책을 내려보냈다. 하나는 조사관을 보내 관련된 폐단을 바로잡고 군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민심 수습책이었다. 다른 하나는 동학의 우두머리는 잡아 효수경중(梟首警衆)하고 원성을 사게 한 김원택은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즉, 금산군의 폐정은 바로잡겠지만 동학은 탄압하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 당시 동학도들은 금산의 토호들에게 소청 비용으로 500냥씩의 금전을 거두었는데 군수가 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사태가 마무리되자 토호들은 동학도들에게 빼앗긴 돈의 회수를 요구했다. 동학도들은 비용으로 다 사용했다고 했지만, 토호들은 극렬 반발했다. 금산의 토호들과 동학도들이 응어리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태는 일단락됐다.


동학도들이 해산하기를 기다리던 토호들과 보부상은 조정에서 동학도의 우두머리를 효수하라는 방침을 받자 바로 보복에 나섰다. 보부상 김치홍과 임한석은 수하 수백 명과 읍의 청년을 동원해 금산 동학의 간부였던 권전주(權全州, 權書房)와 면임인 김정만의 집을 때려 부쉈다. 또 제원역으로 가서 동학도의 집 세 채를 부숴 버렸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과 보부상 간의 갈등은 더 깊어갔다.


보부상과 토호들에 의해 동학도들이 공격받자 동학도들은 다시 진산의 방축리에 집결했다. 약 1천 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은 무장 기포와 백산 대회의 소식을 듣고 진산읍을 공격하는 것은 미루고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동학도들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보부상 김치홍과 임한식은 이들을 치기 위해 인원을 동원했지만 4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인원으로는 1천 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때마침 용담현령 오정선이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오자 토호들과 보부상들은 오정선을 설득해 동학농민군 토벌하자고 요청했다. 이렇게 관군이 동원되자 동학농민군을 치기 위한 토벌군도 1천 명에 육박했다.


4월 2일 토벌군은 진산의 방축리로 출동해 동학농민군을 기습했다. 토벌군의 기습으로 동학농민군은 114명이 살해됐다. 기습에 놀란 동학농민군은 부안 방면으로 급히 빠져나가 전봉준의 부대에 합류했다. 막상 동학농민군을 살해해 기선을 제압했지만, 얼마 후 동학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호들과 보부상들은 동학농민군의 보복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에 대비하기 위해 금산읍내에 도훈소(都訓所)라는 진소(陳所)를 설치하고 매일 밤 읍민들을 동원해 작통(作統)해서 순찰을 돌게 했다. 동학농민군에 대비하던 금산의 토호와 보부상에게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황룡촌에서 경군에게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은 사색이 되었다.  

 

▲ 금산향교. 금산의 동학농민군이 재기포하자 금산의 보수세력들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민보군을 조직했다.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은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전투를 벌였고 결국 동학농민군이 승리했다. 동학농민군은 금산관아를 점령해 보수층을 학살하고 보수층의 근거지인 금산향교를 불질렀다. 그러나 조선시대 만들어진 건물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향교 전체를 불지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화약으로 금의환향한 동학농민군

5월 7일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이 화약을 맺자 토호들과 보부상들을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전주화약에서 전봉준은 김학진에게 집강소 설치를 관철했고 6월 중순부터 각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됐다. 금산의 동학농민군도 기세등등하게 고향으로 돌아와 집강소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금산의 보수 세력은 전찬관 정숙조를 맹주로 추대하고 의려(義旅)를 조직해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고 동학농민군에 저항했다. 군수 이규문은 토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김학진의 지시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관민상화(官民相和)를 시작했다. 그러자 토호들은 동학농민군들의 보복이 두려워 집을 버리고 금산을 떠났다.

   
보수층의 저항으로 금산에 집강소가 설치된 것은 6월 중순이었다. 집강소가 설치되고 집강에 용담의 김기조가 임명됐다. 집강소가 설치되자 보수층의 저항을 중단됐다. 동학농민군을 살해한 보수층들이 금산에서 도망쳐 동학농민군도 보복할 수 없었다. 또 전봉준이 보복을 지양하라고 해서 큰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심이 안정되고 9월의 재기포까지 동학농민군과 금산군민은 평화롭게 지냈다. 동학농민군은 신분타파 운동을 전개하며 군민들에게 동학에 들어오기를 권했다. 동학농민군이 군수에게 여러 차례 동학에 입도할 것을 권할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위세는 컸다.

 

▲ 소리니재. 1984년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이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동학농민군이 승리해 금산 관아를 점령하고 보수층이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만들었다.


동학농민군의 재기포와 금산 일대 장악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국면이 전환됐다. 7월 초부터 대책을 고심하던 동학농민군은 항일전을 결의했다. 8월 25일의 남원대회에서 5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항일을 다짐했다. 9월 18일 교주 해월 최시형은 전 동학도에게 기포령을 내렸다. 김홍집 내각은 동학농민군이 재기포하자 일본군에 동학농민군 토벌을 요청했고 9월 22일 정부도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임명해 동학농민군 탄압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9월 30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후비보병제19대대를 입국시켜 동학농민군 소탕을 시작했다.


관군과 일본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각지의 보수층들은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라고 종용했다. 9월 27~8일 순무영에서는 금산의 정두섭을 소모관으로, 수교인 정지환을 본관 군령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곧 정숙조를 맹주로 추대하고 민보군 조직을 본격화했다. 이렇게 편성된 금산의 민보군은 250명 정도였다.


금산의 동학농민군은 해월의 명령으로 논산으로 집결하고자 동원을 시작했다. 옥천, 영동, 진산, 금산, 고산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자 민보군은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려 했고 이를 감지한 진산의 동학농민군은 김개남군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진산 동학농민군의 요청을 받은 김개남은 일부 병력을 금산으로 보냈다.


10월 22일 진산군과 금산군의 접경지대인 소리니재[松院峙]에서 금산의 민보군과 동학농민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오후부터 전개된 전투는 24일까지 이어졌다. 24일 동학농민군이 산 위에서 함성을 지르며 노도처럼 밀고 내려가자 민보군은 금산으로 도주했다. 동학농민군은 여유를 주지 않고 민보군을 뒤쫓아 64명을 살해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민보군의 군관 정지환은 금산관아로 끌려가 사살당했고, 동생 정영백도 사기점에 끌려가 죽었다. 소모관 정두섭은 부하 수십 명과 같이 경상감영 중군 박항래를 찾아가다 유가면 오동리에서 동학농민군에 체포돼 금산군 장대로 끌려와 포살됐다. 맹주인 정숙조도 25일 제원역에서 체포돼 살해당했다. 4월 2일 자행된 보부상과 보수층의 학살에 대한 보복은 이렇게 끝이 났다.


금산의 동학농민군은 금산 관아를 점령하고 공정과 향교, 보수 세력의 집을 모조리 불태워 이들이 재기하지 못할 산채로 만들었다. 그리고 11월 7일 용담현으로 들어갔다. 민보군이 저항했지만 무주접주 이응백이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합세해 다음 날 아침 용담현을 점령했다. 이렇게 위세를 떨친 진산과 금산, 그리고 옥천의 동학농민군은 뜻밖에 11월 11일 공주 우금티 전투와 13일 청주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조재벽과 최사문·최공우 부자는 끝까지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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