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의 옥중 생활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11-06 09:39:37
  • -
  • +
  • 인쇄
해월 최시형 평전

이종훈, 해월에서 편지 보내

이종훈은 김준식으로부터 해월이 서소문 감옥에 수감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했지만, 한편으로 해월이 병환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을 졸였다. 이종훈은 해월의 직접적인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편지를 하나 만들어 이튿날 김준식을 찾았다. 이종훈은 김준식에게, “그 노파가 이 편지를 어떻게하던지 자기 남편에게 전하여달라고 하는데 참으로 남의 일이지만 눈물나는 일입니다. 형님께서 아무쪼록 좀 전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하! 그 일은 매우 힘든 일인데!”하고 김준식이 난감해하자, “그러나 형님이 전해주실 마음만 있으면 못하실리야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 아우의 일로 알으시고 좀 전하여 주십시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 이종훈(李鍾勳).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이종훈은 해월 최시형의 옥중 생활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인물이었다. 그는 동학교단을 대표해 서소문의 옥리 김준식에게 접근해 감옥의 해월과 서신 교류를 했을 뿐 아니라 해월이 재판장으로 오가는 모습을 지켜본 인물이다. 이 사진은 <천도교회월보> 통권 제32호(1913.3)에 실린 것이다. 당시 이종훈의 직책은 성도사(誠道師)이며 장로(長老)였다.


김준식은 이종훈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으로 가서 은밀히 편지를 해월에게 전해주고 해월로부터 답장을 받아 왔다. 이종훈이 전한 해월의 답장의 주요 내용은 <신인간> 통권 제14호(1927.7)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편지 보았소. 여러 도인 다 잘 있습니까? 여러 도인(道人)들은 내가 이렇게 된 것을 조금도 근심하지 말고 그저 잘들 만 믿으시오. 내가 이리되었을수록 더욱더 잘 믿어야 합니다. 아무 일도 없이 우리 도의 일은 더욱더 잘 될 터이니 그저 잘들 만 믿으라. 나는 설사로 해서 매우 괴롭게 지냅니다. 돈 있으면 50냥만 들여 보내주시면 요긴하게 쓰겠소.

이종훈은 해월의 편지를 갖고 손병희 등 교단 지도부와 만나 함께 돌려보았다. 손병희 등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교단을 걱정하는 스승의 마음에 감격했다. 해월은 자기가 수감돼 도인들이 교단을 떠날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수감됐다고 도를 버리지 말고 더 열심히 믿으라고 당부했다. 이처럼 해월의 편지에는 자신에 대한 신상보다는 동학 교단을 걱정하는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감옥에 수감돼 몸이 편치 않은 힘든 상황에서도 해월의 주된 관심사는 동학 교단의 안정과 교인들의 신앙이었다. 


이종훈은 이후에도 해월과 여러 번 서신을 교환했지만, 가족에 대한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해월은 가족의 일보다 항상 교단의 일을 중시했고 감옥에 갇혀서도 마찬가지였다. 

 

▲ 해월의 친필. 1892년 8월 21일 해월이 청주 송산 손천민의 집에서 충주에 사는 신(辛) 사과(司果)에게 착실한 인재 40인을 골라 명부를 작성해 9월 10일까지 직접 찾아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해월의 친필로 <신인간> 통권 제361호(1978.10)에 실려있다. 해월이 학문적 식견을 갖고 있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50냥의 돈으로 떡을 사서 죄수에 나눠줘

해월이 감옥에서도 최 보따리라고 불렸다는 것을 김준식의 이야기로 알 수 있었다. 해월은 감옥에서도 최 보따리 모습 그대로였다. 이종훈으로부터 해월이 설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손병희 등 제자들은 용삼탕(茸蔘湯, 녹용과 인삼으로 끓인 탕)을 만들어 김준식을 통해 감옥의 해월에게 보냈다. 손병희 등은 설사로 인해 기력이 쇠잔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용삼탕과 같은 좋은 음식을 만들어 감옥으로 보냈다.


그리고 음식과 함께 해월이 부탁한 돈 50냥을 마련해 감옥으로 들여보냈다. 해월은 이 50냥을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았다. 해월은 그 돈으로 옥리들에게 떡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해월은 옥리들이 떡을 사 오면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해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월은 감옥에 갇혀있는 죄인들이 너무 배가 고파하는 것을 보고 마치 자신이 배가 고픈 것과 같이 안타깝게 여겨 50냥의 돈을 다 떡을 사 오게 해서 죄수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나눠주었다. 감옥에서 해월은 계속 설사를 하고 있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해월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배고픈 죄수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러면서 해월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돈이 없고 지체가 낮아서 죄수들인 된 것이 아니냐며 세상의 불평등을 지적했다.

쇠약한 몸으로 고등재판소로 이동해 재판받아

서소문 감옥에 수감된 해월은 고등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갑오개혁으로 재판소가 만들어지면서 조선의 법률체제가 변했다. 1894년 7월 8일 사법관의 재판 없이 형벌을 가하지 못하는 개혁안이 만들어졌고 이어 1895년 3월 25일 재판소구성법이 만들어져 이른바 근대적인 법률체제가 마련됐다. 이 재판소구성법에 의해 5종의 재판소가 만들어졌는데 특별법원, 한성재판소 및 인천 등의 개항장재판소, 지방재판소, 상급심인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가 있었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는 1899년 5월에 평리원(平理院)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해월은 국사범(國事犯)이었기 때문에 하급심인 한성재판소를 거치지 않고 고등재판소에서 바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고등재판소는 조선 시대 의금부를 대체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등재판소의 자리는 의금부의 자리를 그대로 사용했다. 조선 시대 의금부의 위치는 한성부 중부 건평방으로 현재 종로구 종로 47의 SC제일은행의 본점 자리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앞 SC제일은행의 본점 화단에 의금부 터 표지석이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종훈의 증언에 해월이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하고 있는데 고등재판소는 약 5년간만 유지되고 이후 평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억한 것으로 보인다.


해월은 서소문 감옥에서 고등재판소까지 길을 걸어서 재판을 받으러 다녔다. 감옥에서 재판소까지의 거리는 약 2킬로미터 남짓 돼 그리 긴 거리는 아니었다. 당시 이종훈은 김준식의 집을 매일 드나들었기 때문에 언제 해월이 재판을 받는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해월의 첫 공판은 해월이 서소문 감옥으로 이송된 지 열흘이 지난 4월 20일에 열렸다. 이종훈은 이날 아침 일찍 밥을 하고 감옥 앞으로 가서 해월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감옥 주변을 서성이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해월이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당시 해월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이종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열 시나 열한 시쯤 되면 신사께서 나오심을 보이게 되는데 신사께서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신 어른이실지라도 나이 칠십이 세나 되시고 수 삭 동안 옥중에 계시고 겸해서 병환으로 오랫동안 계신 어른으로서 목에다 접목 칼을 쓰시고 나오시는 얼굴을 보면 뼈가 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였다.

해월은 평소 기골이 장대한 편이었으나 이천 앵산동에서부터 시작한 이질 때문에 설사로 고생했는데 감옥에서도 병이 지속해 이종훈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다. 이런 해월의 모습을 보고 이종훈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고 기억했다.
 

▲ 칼을 쓴 죄수의 모습. 해월도 위의 그림과 같이 칼을 차고 서소문에서 고등재판소를 왕복하며 재판을 받았다.

아이고 목이야! 아이고 다리야!

해월이 재판을 받으러 가는 감옥에서 재판소까지는 모전교와 혜정교를 지나야 했다. 이 길을 가면서 해월이 피골이 맞닿을 정도로 수척한 상황에서 전옥칼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옥졸 한 사람이 해월이 쓴 전옥칼 앞머리를 받들고 나서야 근근이 걸어갈 수 있었다. 옥졸이 전옥칼을 들어주었지만, 해월은 힘이 없어서 중간에 “아이고 목이야! 아이고 다리야!” 하면서 한두 번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당시 해월은 약 10여 차례 재판을 받기 위해 서소문에서 고등재판소까지 왕복했는데, 이종훈은 한 번도 빠짐 없이 해월을 따라 그 길을 왕복했다. 그러자 해월도 이종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해월은 한 번씩 자신을 따라오는 이종훈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종훈은 그러다가 어떨 때는 해월과 눈이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러면 해월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며 깊이 비감(悲感)하는 모습을 보여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이종훈은 그런 해월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보고 혹시라도 동학도라고 의심할까 봐 눈물을 안 흘리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이 당시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다고 소감을 남겼다.
 

▲ 의금부(義禁府) 터. 조선의 특별사법 기관이었던 의금부는 왕권 유지를 위한 특별범죄를 다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의금사로 이름이 바뀌고 법무아문에 속했다. 이듬해인 1895년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로 바뀌었다가 1899년 평리원(平理院)으로 개편됐다. 해월은 고등재판소 시기에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지하철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본점 화단에 이 표지석이 있다.

5월 29일 사형 선고받아

해월은 이천의 앵산동에서부터 이질로 고생했다. 이런 상태에서 감옥에 수감돼 그 증상이 더욱 악화됐다. 제자들이 용삼탕 등으로 해월의 원기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미 해월은 중태에 빠진 상태였다. 고등재판소에서는 중죄인을 옥중에서 병사시키는 것은 나라의 체면이 아니라고 보고 재판을 서둘렀다. 


해월에 대한 재판은 4월 20일 시작해 10여 차례의 재판을 거쳐 5월 29일 판결이 났다. 해월의 죄명은 대명률 제사편 금지사무사술조(大明律祭祀編 禁止師巫邪術條)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교수형(絞首刑)이 선고됐다. 당시 고등재판소의 검사는 윤성보(尹性普), 태명식(太明軾)이었고, 검사시보는 김낙헌(金洛憲)이었다. 재판장은 법무 대신인 조병직(趙秉稷)이었고 판사는 주석면(朱錫冕)과 조병갑(趙秉甲)이었다. 


해월을 재판한 판사 조병갑은 바로 동학혁명의 원인을 체공한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조병갑은 동학혁명으로 인해 절도(絶島)에 유배됐다가 1년 만에 복권돼 갑오개혁으로 사법권이 독립되고 재판소가 만들어지자 판사로 임명됐다. 동학혁명의 장본인이 제거되지 않고 다시 복권돼 고위직인 고등재판소의 판사가 돼 오히려 동학 교조의 사형을 선고한 인물이 됐다는 점에서 조선이 얼마나 지배층 중심의 사회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오늘의 울산 이슈

뉴스댓글 >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경제

+

사회

+

PHOTO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