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을 통일한 초원의 영웅 누르하치

박종범 자유여행가 / 기사승인 : 2019-09-06 09: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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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8대 고도를 가다

명나라의 대 여진족 전략은 전통적인 이이제이로 여진족을 위무해 귀속시킨 다음 고비사막 북부의 몽골을 견제하는 데 이용했다.


명나라 영락제는 만주의 여진족을 복속시킨 후,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주, 해서, 야인 여진으로 분할 통치한다. 이중 건주 여진은 주로 요동의 산간 지방에 거주했는데, 그 수장은 명나라로부터 ‘건주위 지휘사’로 임명받아 건주 여진족 뿐 아니라 해서와 야인 여진족을 위무하게 했다. 만주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진·한 시대에는 ‘숙신’, 수·당 시대에는 ‘말갈’, 오대 이후에는 ‘여진’이라 불리다가 명나라 후기부터 ‘만주족’이라 불리게 된다. 


17세기 초 만주벌판에 ‘누르하치’라는 한 위대한 추장이 출현한다. 성은 ‘애신각라’였다. 애신은 ‘금(金)’, 각라는 ‘족(族)’을 뜻하는, 말이다. 누르하치는 건주위의 추장 탑극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19세 때 가출해 조선족 출신 명나라의 장군 이성량(임진왜란 당시 파병된 명나라 요동 총병 이여송의 아버지)의 수하가 된다. 당시 건주 여진의 지휘사 왕고가 반란을 일으켜 무순을 침략한다. 

 


이때 이성량은 명나라의 토벌사령관으로서 6만 명의 명군을 동원해 왕고의 반란군을 궤멸시키게 되는데, 이 싸움 과정에서 명나라 편에 속했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반란군으로 오인돼 명나라 병사에게 죽게 된다. 한편, 왕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이성량은, 여진족 가운데 가장 위엄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세력을 길러 명나라가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되는데, 이때 눈에 들어온 사람이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나이도 젊지만 현명하고 유능했다. 누르하치는 가슴속에 맻힌 원한을 숨기고 철두철미하게 명나라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세력 증강에 명나라를 이용한다.


누르하치는 군사를 일으켜 건주 여진에 속해 있는 5부를 토벌해 1589년 건주 여진을 통일한다. 이에 건주 여진의 북쪽에 위치한 해서 여진은 변방의 여러 부족을 규합해 9부 연합군을 결성, 누르하치를 공격했으나 그는 9부 3만의 연합군을 격퇴시켰다. 이렇게 9부 연합군을 격퇴시킨 저력에는 명나라와의 교역에서 얻은 경제적 이익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무렵, 뜻밖에 누르하치에게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조선에서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 파병과 군량과 군수물자 보급에 주력하다 보니 누르하치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게 된다. 누르하치는 “동해에서부터 서쪽의 요동 변방까지, 북으로는 몽골의 눈강에서부터 남으로 조선과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언어를 쓰는 부족은 모두 정복”한다. 1616년 1월 누르하치는 해서 여진의 대부분을 겸병하고 요령성 신빈현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금이라 칭하는데, 역사상으로는 후금이라 불렸다. 이때 누르하치의 나이 53세였다.

 


누르하치는 몽골족의 칭기즈칸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정복자이자 군주였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하고 중원의 명나라와 당당히 맞서기까지 그의 성장 과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을 굽히고,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며, 자신의 실력을 은밀하게 키워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명나라에 아주 공손하고 온순한 태도를 보였다. 


만력 18년과 21년에는 스스로 두 차례나 북경으로 들어가 조공을 바치는 성의를 보였다. 만력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그는 조공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계속해서 명나라 조정의 관리로 봉해달라고 애걸했다. 또한 자신은 왕을 자처하거나 반역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입장을 역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톱을 드러내기 전까지 온순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명나라 조정을 완벽하게 속아 넘겼다. 누르하치의 이러한 연출은 그가 명나라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칸에 오르고 후금을 건국할 때까지 계속됐다. 


누르하치는 세력이 강력해졌다고 해서 결코 자만에 빠지거나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조선의 사신으로 압록강 건너 비아랍에 가서 누르하치를 만나고 돌아온 신충일의 일기, <건주기정도기>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건장한 몸매에 바르고 큰 코와 검고 긴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누루하치는 후금을 세울 때까지 20여 년 동안 명나라 조정에 평균 3년에 한 번 정기적인 조공을 함으로써 명나라에 충성을 표시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황실의 비호와 특혜를 받으며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갈 수 있었다.


본래 여진족은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정치를 실시하고, 각자 발전했다. 당연히 어떤 규약이나 사회적 약속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산방식 역시 통일된 체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각자의 재산 역시 약탈당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비아랍성에서 왕으로 자처하며 전면에 등장한 다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도적질을 못하게 만들었으며 병사들이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또 점령한 지역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전통적 방법도 쓰지 않았다. 여진족은 전쟁과 정복을 재물을 강탈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민족이었다. 게다가 생산력이 낮아 전쟁을 통해 약탈한 재물을 수입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 다음해에 드디어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무순을 공격한다. 그의 예하에는 이미 12만 명의 정예병력인 팔기군이 있었다. 무순 함락 소식을 접한 명나라 조정은 비로소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누르하치에게 총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살이호 대전’으로 이 싸움에서의 패배는 명나라가 쇠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는 분수령이 됐다.


“후금 병사가 성에 도달하자 앞을 다퉈 목을 매 죽었다. 집에는 빈 대들보가 없었고 나무 역시 빈가지가 없었다. 한 가족은 5~6세 아이까지 모두 목을 매 죽었다,”'(광해군일기). 만주 팔기군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들이다. 만주를 넘어 중원 정벌을 꾀하던 누르하치는 그 후 생각을 고쳐 다음과 같은 한족 회유책을 실시한다. “요동의 명나라 관원에게 각각 과거의 직책을 그대로 맡게 하겠다. 백성들 역시 옛날의 직업을 가지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 팔기군은 무고한 사람을 절대로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금나라 칸의 명령에 따르고 금나라 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경우”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다. 기준은 만주식 변발이었다. 누르하치가 ‘황비홍 머리’를 강제한 데에는 한족의 존엄성을 모독해 저항의 의지를 원천봉쇄시키기 위함이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명나라 백성들이 머리를 깎는 대신 목을 내놓아야 했다. 당시 한족은 오랜 유교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삭발은 한족을 오랑캐처럼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의 진정한 상대는 몽골족 최강의 부족인 찰합이의 임단 칸이었다. 당시 임단 칸은 동북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에 누르하치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임단 칸은 자신을 40만 대군의 몽골 국왕이라 칭하면서 누르하치는 “물가의 3만 만주국 주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단 칸은 몽골의 다른 부족의 소와 양을 약탈하는 것을 즐기는 포악무도한 폭군에 불과했다. 게다가 명나라의 지원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는 예전 몽골족이 중원에 세운 왕조 원나라의 원수였음을 몽골 초원에 호소한다. 누르하치 사후, 찰합이 부족이 정복되고 고비사막 남쪽 몽골 지역은 모두 후금에 병탄됐다.


누르하치는 전쟁에 임할 때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그는 후계자 계승 문제에서도 적장자를 세워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포기한다. ‘4대 패륵’에게 매월 번갈아 가며 국정을 운영하게 하는 ‘월별정무책임제’를 도입한다. 그가 일생을 바쳐 어렵게 얻은 성과가 탐욕스러운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고심 끝에 ‘팔왕 공동 통치’ 제도를 고안해 낸 것이다.


“칸의 자리에 오를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이 군주가 되면 힘을 숭상하고 자만하여 하늘에 죄를 짓게 된다. 여덟 화석패륵 중 주위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고 덕이 있는 자를 택해 뒤를 잇게 하겠다. 오로지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만이 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재능이 없으면서 다른 이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묵묵히 앉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면 패륵 자리를 박탈할 것이다. 성으로 들어와 군주를 알현하려거든 혼자서나 둘이서 들어오지 말고 모두가 같이 모여 국정을 논의해야 한다.”


팔왕은 새로운 대칸을 뽑을 권리가 있었으며, 자신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대칸을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팔왕이 같이 국정을 논의한다는 것은 여덟 가문의 만주족, 몽골족, 한족 출신도 공동의결에 참여함을 의미했다. 누르하치가 이 여덟 가문에게 국정을 맡기고 이 여덟 가문에 속한 귀족집단이 국가의 최고 권력기구가 된 것이다. 누르하치의 이 정치개혁은 자손들의 권력투쟁 발생을 막고 4대 패륵간 균형을 유지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이 같은 전통은 이후 옹정제에 의해 선대 황제가 후계자를 공표하지 않고 밀지에 적어 황제 사후에 개봉하는 제도로 이어진다. 청 왕조가 후계자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없었던 이유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태종 홍타시는 명나라의 배후 세력인 조선의 정벌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청 태종이 제위에 오른 해인 1635년, 조선 친정과 명나라 정벌이 감행된다. 태종이 산해관을 향해 진격할 때 그의 동생 도르곤은 산동성을 공략해 50개 성을 무너트리고 8개 성을 항복시켰으며 46만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기 위해서는 우선 산해관의 외성에 해당하는 네 개의 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했다. 명나라의 현지 군 수뇌부인 홍승주 등은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네 개의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북경 조정은 속전속결할 것을 주장하는데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싸움에 나선 명군은 대패했고 산해관의 외성 모두가 청나라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이때 파견된 8명의 명나라 총병 중 오삼계와 왕박은 탈출했고 13만 명의 명군 중 전사자만 5만3000명에 이르렀다. 포로로 잡힌 명군의 총사령관 홍승주는 처음에는 단식으로 자결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밥을 굶다가 청 태종 홍타시가 보낸 미녀와 인삼즙에 녹아 결국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하고 자금성에 들어갔을 때 청나라에서는 태종 홍타시가 이미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여덟 살 푸린이 즉위해 숙부인 도로곤 예친왕이 섭정으로 정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날인 5월 1일 ‘노동절’날, 이번에는 청나라 군대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북경에 입성한다. 명나라의 문무백관들은 성 밖까지 나와 새 권력자의 입성을 환영했다. 1644년 명나라는 멸망했고 청나라가 들어섰다.


박종범 자유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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