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수필’-맹강녀묘, 산해관, 노룡두

문영 시인 / 기사승인 : 2020-08-19 09: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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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로 읽는 열하일기

흥해시 영원성에서 산해관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맹강녀묘는 산해관 들어가기 전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맹강녀묘에서 산해관까지 거리는 6킬로미터다. 주차장 입구에는 뜻밖에도 쌍봉낙타가 우리를 맞이했다.

맹강녀묘

맹강녀묘는 맹강녀 설화에서 비롯됐다. 그 설화는 ‘열(㤠)’이다. 조선시대에 ‘열(㤠)’은 유교의 이념인 ‘충·효’와 더불어 숭배하는 가치 덕목이다. 그래서 조선사신들은 이곳에 들러 맹강녀의 정절을 기렸다. 맹강녀묘 입구에는 그녀의 입상과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맹강녀 설화를 순서대로 나열했다. 진시황이 맹강녀를 아내로 삼고자 한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이곳 만리장성은 진시황 시대가 아닌 명나라 때 축성됐다. 

 

▲ 맹강녀묘 입구 낙타
▲ 맹강녀묘 입구 표지석
▲ 맹강녀묘 입상


연암은 <강녀묘기>에서, “뜰 가운데 비석 셋이 있는데 거기 기록된 것이 모두 같지 않고, 또 허황한 말이 많다. 묘에는 소상을 세우고 좌우에 동남·동녀를 늘어세웠다. 황제가 여기다 행궁을 두었는데, 지난해 심양에 거동할 때, 지나는 행궁마다 죄다 중수하였으므로 단청이 아직도 휘황찬란하다. 묘에 문천상(송나라 충신)이 쓴 주련이 있고, 망부석에는 황제가 지은 시를 새겼으며, 돌 곁에는 진의정이 있다”라고 맹강녀묘(사당)와 망부석의 모습을 기록했다. 실제 와서 보니 연암이 말한 그대로다. 편액만 ‘만고유방(萬古流芳)’으로 ‘꽃다운 향기 영원히 흐른다’란 뜻을 가진 글씨로 바뀌었다. 문천상이 쓴 주련은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원한을 샀지만, 맹강녀는 죽지 않고 천 년 동안 돌조각에 정절로 새겨 전해진다”라는 내용이다. 망부석 바위 옆 다른 바위에는 건륭제의 시를 새겼다. 시는 <피서록>에 실렸는데, “서늘한 바람 늙은 가지 저녁 볕에 우는 듯이(涼風頹樹吼斜陽)/ 이제껏 구슬픈 소리 고운 님을 그리듯이(尙作悲聲吊乃郞)/ 천고의 내 절개를 자랑코자 하랴마는(千古旡心誇節義)/ 이 몸이 죽어 사람 도리를 다함이네(一身有死爲綱常)/ 그날부터 내려오며 강녀라 이름 불러(由來此日稱姜女)/ 당년에 그 슬픔은 기량의 처를 울게 했다네(盡道當年哭杞梁)/ 이 마음 본받아서 아름다움 지킨다면(長見秉彝公懿好)/ 전한 말이 그르다손 무엇이 해로우랴(訛傳是處也何妨)”이다. 

 

▲ 맹강녀 전시관 진시황

 

▲ 맹강녀 소상 주련


맹강녀묘 바위는 울산 치술령에 나오는 박제상 부인처럼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것이 아니라, 맹강녀가 바다에 빠져 죽은 후 바위가 솟아 망부석이 됐다. 그러나 맹강녀 설화의 내용과는 달리 현재 사당 앞은 매립지로 바다는 멀리 떨어져 있다. 맹강녀 설화에 비해 우리나라의 대표적 망부석 설화인 ‘치술령 산모’가 오히려 스토리텔링적인 요소가 풍부하다. 울산 치술령 망부석을 맹강녀묘처럼 교육적이고 관광화하지 못하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이 퇴색한 때문일 것이다.

 

▲ 망부석, 건륭제시비
▲ 망부석, 시비, 진이정


산해관(山海關)

산해관의 이름은 각산 ‘산(山)’자와 발해만의 ‘해(海)’자를 따왔다. 산해관은 둘레가 5킬로미터로 성곽 전체를 뜻한다. 원래 성을 조성할 때 동서남북에 문을 만들었는데 동문인 산해관이 제일 중요한 곳이어서 이렇게 불렸다. 동문은 관외로 향했는데 진동문이라 부르고, 서문은 관내로 향했는데 영은문이라 불렀다. 남문은 바다로 향했는데 망양문이 불렀고, 북문은 위원문이라 부른다. 현재 북문은 없고 서문인 영은문은 최근 복원됐다. 산해관에서 제일 중요한 문은 천하제일관으로 만리장성의 여러 관문 중 가장 웅장하다.

 

▲ 산해관 옹성 성벽

 

▲ 천하제일관문

천하제일관은 하북지방에서 동북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이며, 산해관을 상징한다. 천하제일관은 옹성이 있는 성으로 높이는 14미터, 두께가 7미터, 길이가 4킬로미터로서 정방형이다. 성 위에는 2층과 3층의 전루(활을 쏘는 높은 다락)와 대포까지 갖춰져 있다. 글자 그대로 철옹성이다. '天下苐一關'의 현판 글자 또한 가로 1.1미터, 세로 1.6미터로 문짝만 해 멀리서도 뚜렷하다. 명나라 소헌이라는 사람의 글씨인데 현판과 관련해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중 소헌이 혼자서 쓴 게 아니라서 자기의 낙관을 찍지 않았다거나, 경사 때문에 건물이 조금 기울어져,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각 글씨의 크기를 달리 했다는 가이드의 말은 그냥 이야기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원래 ‘제(第)’자 위에 ‘대나무 죽(竹)’자가 있어야 하는데 글자의 균형을 위해서 ‘풀 초(艸)’자를 썼다고 하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 안쪽 전시관 벽에 걸린 ‘天下苐一關’의 복사 현판을 보면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천하제일관문 글자

연암이 <산해관기>에서, “산해관의 첫째 관은 옹성이어서 다락이 없고, 옹성의 남·북·동을 뚫어서 문을 내고 쇠로 만든 무지개 모양의 둥근 문 위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 위엄이 중화와 오랑캐를 누른다)’라 새겼고, 둘째 관에는 4층의 적루(敵樓, 적을 막기 위한 성루)로 되었는데 무지개 모양의 문에 ‘산해관’이라 새겼고, 셋째 관은 삼첨(처마가 셋인 누각) 높은 다락에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을 붙였다”라는 기록 그대로다. 조선 사신들은 천하제일관을 지나서 병부분사(兵部分司)에서 통관 절차를 밟았다. 성안 패루를 지나 중앙 사거리 종고루(2004년 복원됨)를 거쳐 거리를 따라 직진으로 가면 2000년대에 복원됐다는 서문인 영은문이다. 영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관내에 들어서는 것이다.

 

▲ 전루
▲ 산해관성 안 패루, 복원된 종고루(앞), 서문인 영은문(뒤)

 

▲ 산해관 각산장성


산해관을 보고 난 후 연암은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끄는 것은 산해관 같은 성벽과 무장한 무력보다는 내부의 모순과 분열을 없애고 민생과 민심의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더하여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이 얼마나 큰 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를 것이요, 산해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이 얼마나 장한지를 모를 것이다”(‘장대 견문기’에서)라는 감회를 남겼다. 산해관성 위에서 북쪽을 보니 각산의 줄기를 타고 만리장성이 이어졌다. 남쪽을 보니 발해만 쪽으로 흘러가는 만리장성이 보인다. 산해관에 대해 찬탄했던 연암의 말이 실감 나게 와 닿는다.

 

▲ 영해성 내 출입문


노룡두

노룡두는 바닷물에 용머리 형상을 한 만리장성 동쪽 끝머리를 말한다. 노룡두는 영해성을 거쳐 가야 한다. 영해성은 산해관성으로부터 동남쪽 5킬로미터 정도 거리로 바닷가에 있다. 우리는 영해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북문으로 들어갔다. 영해성은 수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용무영이라는 병영이다. 그곳에는 막사와 전함과 여러 기구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사용했던 팔괘진이다. 도로를 따라 남쪽 언덕에는 징해루가 있다. 징해루의 2층은 이곳을 지킨 명나라 장수 손승종의 글씨인 ‘웅금만리(雄襟萬里)’, 1층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글씨인 ‘징해루(澄海樓)’의 현판이 걸렸다. 징해루는 조선 사신들이 관해정 또는 망해정이라고 했는데, 연암은 망해정이라 기록했다. 그런데 연암은 이곳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 근거로 징해루를 망해정이라고 했을 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노룡두나 영해성에 관한 기록도 없다. 그가 이곳을 둘러보았다면 그의 행적으로 보아 당연히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 징해루
▲ 징해루, 노룡두
▲ 노룡두

 

▲ 해신묘

 

▲ 노룡두의 장대

징해루에서 20여 미터 정도에 노룡두가 있다. 만리장성이 용의 등줄기라면 노룡두는 용머리인 셈이다. 노룡두 해변을 따라가다 보면 해변 모래톱에는 세 채의 누각과 한 개의 정자로 구성된 해신묘가 있다. 해변에는 건륭제의 비석이 있고, 입구 패루를 지나면 남신인 해신묘, 바다 가까운 안쪽 천후궁은 여신을 모신 신전이다. 


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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