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에 그리움이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19-11-28 09: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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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지난봄 채 녹지 못한 눈이 매화나무 가지를 덮고 있을 때 세찬 바람 속에서도 뾰족이 얼굴을 내민 매화 꽃망울을 보고 시린 손끝으로 유리병 속에 가득 따 담았다. 눈을 감아도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 얼굴들, 그러나 겨우내 봄을 기다리듯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하며 찻잔에 매화 꽃망울 하나 띄워 놓고 마주 앉고 싶었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 이른 봄 등산길에 영지사(靈智寺) 앞을 지나다 절집 뜰에 핀 매화를 보고 마당으로 성큼 들어서 허락도 없이 마루에 앉아 소박한 정원을 감상할 때였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노승(老僧)이 매화만 보지 말고 들어와 선방(禪房) 꽃차라도 한 잔 나누고 가시면 어떠냐고 했고, 나는 조금은 주저하면서도 서슴없이 들어가 노승과 마주 앉았다. 가부좌(跏趺坐)로 앉은 노승의 모습은 무척 말라보였지만 눈에는 맑은 빛이 감돌아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손수 달여내는 녹차 빛깔이 그날따라 노승의 가사(袈裟) 빛깔처럼 맑고 담백해 보인다.


노승(老僧)은 이른 봄 귀한 손님이 오면 찻잔 속에 띄워 주려고 매화 꽃망울을 따서 냉장고에 보관했노라며 뜨거운 찻잔 속에 꽃망울 하나 띄워 준다.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았던 꽃망울이 뜨거운 찻잔 속에서 새색시의 보조개처럼 살포시 잎을 펴기 시작했다. 찻잔을 입에 대고 조심스레 불어가며 차를 마시는데 어느덧 매화향이 차향과 더불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찻잔 속에서 옷을 벗는 꽃 몽우리, 은은한 향기, 별말은 없었지만 이미 선방은 선경(仙景)을 이루고 무언(無言)의 법거래(法去來)가 오가는 것이었다. 


그날 선방(禪房)에서 마신 차 한 잔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부터 이른 봄이면 매화 꽃망울을 따려고 날을 받고 시간을 정해서 산야를 찾았다. 조금만 그 시기를 놓치는 날이면 꽃망울이 그 자태를 활짝 터트려서 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망울을 따야만 뜨거운 찻잔 속에서 드러내는 속살의 경이(驚異)를 볼 수 있기에 말이다. 

 


이후로부터 나는 혼자 차 마시는 시간을 소중히 가꾸어 왔다. 비좁은 작은 방 한편에 차 끓이는 나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어 세상의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을 뒤로 하고 앉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반가운 사람과 함께 마시는 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홀로일 때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그를 위해 차 한 잔을 내어놓는다. 이제는 습관처럼 누군가를 위해 찻잔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신다. 매화 꽃망울도 곱게 띄워본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는 순간이다. 차가 식으면 잔을 비우고 뜨거운 차를 다시 부어 놓는다. 이때 내 앞에 있는 찻잔은 그리움의 찻잔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그리움의 찻잔을 앞에 놓기도 하고, 멀리 집을 떠난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찻잔을 놓기도 한다. 때로는 아련히 떠오르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며 차 한 잔을 담아내기도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를 초대해 놓고 차를 마시는 것이다. 나는 이를 가리켜 ‘그리움의 다도(茶道)’라고 부른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속절없이 눈물이 난다.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심사를 속으로 달래며 차를 끓인다. 물론 그리움의 찻잔도 앞에 놓는다. 전등불을 끄고 램프에 불을 켰다. 골동품 가게서 구입한 녹슨 램프도 제몫을 다하고 이제 천지가 아득해지며 만사가 적멸(寂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눈을 감는다. 차향이 아쉬운 듯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비에 젖은 풀잎의 속살거리는 소리도 들릴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중에는 끝내 떠오르지 않는 옛 친구도 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행여 마음 수면에 풍랑이 일면 아름다운 모습들이 사라질까 숨을 죽인다. 내면에 물결이 조금만 출렁거려도 희미하게 보이던 얼굴들이 흩어져 날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밤 찻잔 속에는 맑은 하늘이 있고 그 속에 그리운 이의 모습도, 초원에 선 고독한 목자의 모습도 보인다. 찻잔을 앞에 놓고 하고픈 이야기들,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 아픔에 눈물 짖기도 하고 부끄러움에 피식 웃기도 한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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