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의 기원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2-14 09: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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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올해는 10년 단위로 끊어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억해왔던 주요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기,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70년. 그 중 한국전쟁은 그 뒤에 벌어진 수 많은 사건들과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 해방을 맞이한 1945년부터 만 5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초기 왜 수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다가올 미래를 포함해 시간적 위치를 찍는 좌표가 찍혀 있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 새롭게 출발하려면 직시해야 할 순간이다. 


더구나 울산은 한국전쟁 발발 뒤 3개월 안에 최소 87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는 국가기구에서 공식 조사해 발표한 결과지만 ‘언제, 왜, 어떻게’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게다가 학살이 빚어낸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시민사회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1945년 해방 후 울산부터 1950년 한국전쟁 기간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의 해법을 찾아가고자 한다.<편집국>


‘보도’의 어원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이하 보도연맹)은 줄여서 보도연맹 또는 보련(保聯)이라 불렸다. 이 단체는 1949년 4월 20일 서울에서 창립해 전국에 본부와 지부를 구성했다. ‘보도’란 ‘보호(保護)’와 ‘선도(善導)’를 합친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운영한 ‘교외보도연맹(校外敎護保導聯盟)’이라는 단체 이름에서부터다. 가입 대상과 결성 목적은 학교 밖에서 학생들의 활동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이후 1936년 조선총독부 법무국 행형과가 발간한 ‘보호선도기관조사서류’에서 ‘보도’라는 단어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법무국에서 지방법원에 이른바 ‘사상범 선도 기관’ 설치를 지시했는데, 일제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조선인 사상범 관리를 위한 틀을 짜기 위해서였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38년 7월과 8월, 잇따라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이하 사상보국연맹)’과 ‘조선방공협회(朝鮮防共協會)’를 창설했다. 일본제국주의를 위협하는 조선인 사상범을 관리하고 특히 사회주의 사상을 박멸하기 위한 단체다. 시기는 1937년 7월에 개전한 중일전쟁이 확대한 때였다. 2차 세계대전 진주만공습(12.7)이 벌어지기 전 1941년 9월에 ‘조선사법보호협회(朝鮮司法保護協會)’를 만들었다. 그 뒤 1942년 3월 23일 칙령 제193호 ‘조선사법보호위원령’과 칙령 ‘조선사법보호사업령’으로 제도적 정비를 완료한다.
 

 

▲ 위 조선총독부 ‘보호선도기관조사서류(1936년)’, 아래 ‘국민보도연맹원증’(1949)

 

일제강점기 조선인 사상범 관리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사상범을 관민합동단체에 포함시켜 특별 관리에 나선 것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으로 전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과 동시에 이뤄졌다. 독립운동에 나선 조선인, 그중에서도 사회주의 계열 사상범이 후방에 남아있다면 우환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상범과 사상범죄의 기준은 3.1만세운동 이후 제정한 ‘치안유지법’ 등 사법체계를 보다 세심하게 다듬어가며 완성했다. 일본제국 사법성이 규정한 사상범은 다음과 같다. ①좌경사상운동에 근거한 범죄 특히 치안유지법 및 치안경찰법, 폭발물취체벌칙 등의 범죄 ②형법 제2편 제1장(황실에 대한 죄), 제2장(내란에 관한 죄)의 범죄 ③출판범죄(조헌문란, 질서괴란, 존엄모독, 사상에 근거한 풍속괴란) ④반동운동(反動運動)에 근거한 범죄 및 반동단체원의 범죄 특히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 ⑤노동운동 또는 노동쟁의에 근거한 범죄 ⑥농민운동 또는 소작쟁의에 근거한 범죄 ⑦수평운동(水平運動)에 근거한 범죄 및 수평사원(水平社員)의 범죄 ⑧소요죄(일본사법성 형사국 ‘사상계검사사무분장규정’(1928.5) 중)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기준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거의 모든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사상범죄를 적용할 수 있었다. 중심에 둔 것은 ‘좌익사상’ 즉 1920년 이후 독립운동의 핵심축이 되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이었다. 그 결과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계열에 대한 대규모 검거와 1차 조선공산당 해산, 1928년 3,4차 조선공산당 체포와 검거를 거쳤다. 그리고 1930년 초가 되면 전국 각 지역에 사상검사와 고등경찰이 전면에 배치된다. 


그런데 형무소 수용 능력이 한계에 이르는 문제가 발생한다. 체포하고 구속한 조선인 사상범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것인 사상범 ‘전향(轉向)’이다. 경수사 단계에서 ‘훈계(訓戒)’ 후 풀어주고, 재판과정에 ‘유예(猶豫)’ 처분을 내리는 것이 1932년부터 확대됐다. 그렇게 조선인 사상범을 전향자로 분류해 석방할 뿐 아니라, 복역 중인 기결수들은 회유와 압박을 가해 전향서를 쓰도록 한 뒤 선별해 가출옥시켰다.


사상범 전력을 갖고 사회에 나온 이들은 1936년 12월 20일부터 시행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따라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경성, 함흥, 청진, 평양, 신의주, 대구, 광주 7개 지역에 보호관찰소를 설치했는데 소장은 사상검사 중에서 임명했다. 거짓으로 전향 의사를 밝히고 석방된 뒤 다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관련 조직 활동에 나선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중점 관리하겠다는 목적이었다.

 

▲ 일제강점기 사상보국연맹 결성식, <조선신문> 기사

일제강점기 전향단체와 방공단체

사상보국연맹은 조선인 사상범 중 보호관찰대상자들을 관리한 단체였다. 보국연맹 결성에는 주요 지역에 만든 보호관찰소가 핵심 역할을 했다. ‘보국’이란 말을 붙인 것은 조선인 사상범이 전향해 일본제국에 보답한다는 것으로 가장 저항의식이 높았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옭아맸다. 더불어 전향자들이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할 기반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전향한 이들을 단순 관리만 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통치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이런 의도는 사상보국연맹의 규약 3조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3조 본 연맹은 전 조선 전향자의 비상시국 하에서의 국가총동원운동을 강화 확충하고, 반국가사상을 파쇄 격멸하여 황도정신의 진기앙양에 힘씀과 더불어 그 자주적 사회복귀의 촉진을 목적으로 한다.” 


사상보국연맹은 전국 주요 도시에 지방조직을 일사천리로 구성했다. 평양, 광주, 대구, 신의주, 함흥, 청진 순서로 지부를 결성하고, 지부장은 각 지역 친일 명망가가 맡았다. 부지부장은 지역 보호관찰소장인 사상검사가 맡았다. 1940년 말에 이르면 7개 지부 산하에 83개 분회 총 3300여 명의 연맹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다. 


방공협회(防共協會)는 관이 주도한 대중동원단체였다. 여기서 방공은 말 그대로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것이다. 임원은 총독부 산하 고위직과 친일에 앞장선 이른바 유력인사들이 맡았다. 초대 회장은 총독부 경무국장인 미쓰하시(三橋)가 맡았고 명예직인 총재는 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 고문은 총독과 조선군사령관 등이 추대됐다. 지부 구성은 경찰력을 총동원해 조직했는데 결성 1년 만에 전국 252지부에 19만 명이 넘는 단원을 모집했다. 


두 단체의 활동은 강습회와 강연회 그리고 신사참배, 근로봉사, 군사위문, 헌금모금 등으로 진행됐다. 방공협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에 나섰는데 1939년 1월부터 월간 <방공의 조선> 창간호를 낸 후 매달 3만5000권에서 4만7000권을 제작해 배포했다. 그리고 포스터와 표어를 공모해 시상하거나, 방공·방첩 영화 상영과 연극 상연에도 힘을 기울였다. 방공협회는 창립 1주년이 되는 1939년 8월 15일을 ‘방공·방첩데이’라 이름 붙이고 기념식과 거리행진을 성대하게 개최했다.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일본제국주의와 대치되는 ‘사회주의 사상을 배격하자’는 대규모 퍼포먼스였다. 

 

 

▲ 일제강점기 방공협회 창립 1주년 기념식과 가두행진, <동아일보> 1939.8.16.

대화숙

사상범 관리와 제국주의 선전을 위해 만든 사상보국연맹은 1941년 4월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구)으로 재편된다. 조선총독부는 사상보국연맹 본부와 지부를 모두 해산한 뒤 대화숙으로 편입시켰다. 


대화숙은 전향자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확대해 조직한 수용기관이다. 핵심임무는 여전히 사상범 보호관찰이지만 전향자 가족까지 포함시켜 ‘아예 불령(不逞)한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생활 기반을 바꾸자’는 목적이었다. 대화숙에 들어가면 직업보도기관 수산장(授産場)에서 일을 시키고, 일본어 교육을 받을 때 일제에 동화되는 사상을 새로 주입받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전시체제 속 사상범 관리 및 제국주의 동화를 위한 조선총독부의 노력은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 직전까지 지속됐다. 사상 통제와 더불어 변절한 친일파를 앞세운 선전과 선동활동은 패전이 다가올수록 더 치열해진다. 대표적인 친일파만 뽑아 열거하면 김활란, 장덕수, 유진오(교육), 윤치호, 최린(종교), 서정주, 이광수, 채만식, 최남선(문학), 구본웅, 현제명, 손목인(예술) 등이다. 

 

▲ 대화숙 조직도 ‘광주대화숙’


문제는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식민지 사상관리 정책이 해방 후 4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승만 정권 아래서 ‘보도연맹’으로 고스란히 부활했다는 것이다. 1949년 보도연맹을 창립할 때 친일파와 부역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자신들이 몸담고 경험한 사상단체를 고스란히 베껴 적용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최대규모였던 학살사건을 자행했다. 참담한 대한민국 현대사 속 비극의 기원은 ‘일본제국주의’라는 매우 기괴한 파시즘에서 출발한 셈이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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