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원정대

이근우 시민, 농부 / 기사승인 : 2019-05-15 09: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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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

▲ 채소밭의 청개구리

 

“세계가 바뀌었다. 나는 그것을 물에서 느낄 수 있고, 땅에서 느낄 수 있고, 공기에서 냄새 맡을 수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갓 귀농한 분들이 처음으로 느끼게 될 정서가 저 말과 다르지 않겠습니다.


짧은 여행에서도 우리는 떠나온 곳으로 기우는 심리적 관성을 경험합니다. 낯선 곳에서 겪는 이질감이 크면 클수록 그 관성은 더욱 강해집니다. 물론 낯섦과 익숙함 사이의 긴장이 셀수록 여행은 흥미진진합니다. 그 과정이 잘 관리만 된다면 동요와 흥분마저도 커다란 기쁨으로 전환되는 것이 여행의 묘미입니다. 귀농은 그와 달라서 관성이 파괴되는 여정입니다. 궁극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익숙한 세계의 종말이기도 하고, 정서적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되는 편도 여행이 귀농입니다. 회귀의 욕구는 감정으로만 남을 뿐, 오도 가도 못하는 부랑의 세월을 감내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귀농 초기의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는 주거여건, 농사 작업, 도구 및 인프라, 대인관계 등에서 비롯되는 총체적 현상입니다. 불안정을 조기에 극복하기 위해 귀농인들은 저마다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적응을 서두릅니다. 심리적으로 조급해지기 마련이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 온 힘과 정성을 쏟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에 허점이 생기게 됩니다.


정확한 데이터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대부분의 귀농인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을 짓거나 개량하는 것을 최우선의 일로 삼는 것 같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대단히 잘못된 접근 방식입니다. 지형과 풍토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평생 쓰게 될 집터를 잡는 것은 장기적으로 큰 낭패가 될 가능성이 짙습니다. 주택 수리 또한 나중에 문젯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주거여건이 의외로 귀농의 중요한 조건들을 구속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 봄철 농자재 만들기


갓 귀농한 분들께서는 스스로를 원정대로 생각하는 것이 유리한 선택을 하는 데에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사전에 원정은 “연구, 탐험, 조사 따위를 위하여 먼 곳으로 떠남”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정착과정 역시 이와 같습니다. 원정과 정착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만, 농업의 특성상 귀농은 원정대의 역할을 평생 수행하는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귀농 초기에는 완전한 정착을 전제로 일을 하기보다는 교두보 확보에 몰입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우선순위를 ‘조사’에 두는 생활방식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귀농 초기 주거지는 경작지 인근의 도시형 주거밀집지역에서 임대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집짓기나 주택 수리는 비용이 많이 드는 일임에도 투자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지출이 소요되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도 어렵습니다. 생각과 달리 농사에 전념할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기 십상이고, 부수적인 일이 많아 번거로울 수 있으며 뜻밖의 난관에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원정활동에 비유하자면 초기 단계에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혀 폭넓은 활동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주거문제의 효율적 해결방안은 귀농인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으나 기본적인 원칙은 ‘불편을 감수하는 편의성’에 두어야 합니다. 심리적 안정감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는 것이고, 발 빠르게 생활 전반을 구성할 수 있다는 뜻에서 편의성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선 집짓기나 개량은 중장기 사업으로 미루어 놓는 것입니다. 당장 살 집은 경작지가 있는 마을이 아닌 인근의 도시형 주거밀집지역에서 임대합니다. 이동 거리는 20분 내외가 적당합니다. 지역 특성상 거리가 그보다 멀거나 농사일에 집중을 요할 경우 경작지에 농막을 건축합니다. 농막은 지자체의 조례에 따라 운영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신고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최대 6평(20제곱미터)의 크기로 지을 수 있는데, 일반주택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편리성과 경제성만을 고려한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설치 또는 건축해서 쓸 수 있습니다.

 

▲ 한가한(?) 밤에는 씨 넣기


많은 전문가들이 귀농 초기 단계에서 빠른 적응을 강조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적응을 위한 준비운동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입니다. 최소한 초기 3년의 주거형태는 경작지가 있는 마을 바깥에서 하는 것이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적응 면에서도 유리합니다. 아시다시피 거주지역은 많은 부분에서 생활의 제약조건으로 작용합니다. 귀농하자마자 단숨에 경작지가 있는 마을 안에 주거를 정하는 것은 마을주민과 귀농인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기 십상입니다. 사전정보 없이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의 어색함은 마을주민에게 더 크게 다가옵니다. 지역사회 특유의 구심력은 그들의 일상적 정체성일 뿐이지만, 이방인에게 도드라지게 나타남으로써 강렬한 문화적 차이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흔히 텃세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마을 외곽, 비교적 도시형인 곳에 주거지를 마련하는 경우 지역 특성이나 풍토, 경향성 등에 관한 폭넓은 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해충돌이 없는 지역주민들과의 관계 형성으로 풍토에 익숙해지는 과정입니다. 원정의 ‘조사’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 관한 정치, 경제, 사회적 학습을 하게 되는데, 이는 무척 중요한 과정입니다. 원정에서 하게 되는 ‘연구’이기도 합니다.


귀농할 곳은 선택했으나 아직 경작지나 주거지를 정하지는 않은 귀농 예정자들에게는 해당 군 단위 지역으로 이사만 하고, 경작지는 일 년쯤 뒤에 마련하시라고 강력히 권합니다. 차후에 하게 될 농지매입에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농사짓기에 좋은 지형적 환경과 풍토를 갖춘 농토를 확보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귀농 초기에는 할 수만 있다면 농지매입을 하지 않고, 임대하여 몇 년간 농사지으며 장래의 농업을 설계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귀농인들이 대개 중년이기에 빠른 정착과 안정을 최대의 목표로 삼게 됩니다만, 서두르다가 경제적 손실과 의욕상실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 귀농이고, 그 과정입니다.

 

▲ 봄의 참맛, 머위

어느 빈민운동가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에게 처음에는 손님에게 하듯 각별하게 대접하다가 나중에는 이질감을 드러내며 빈민들과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자신들과 동류로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척 기뻤다는 그는 둘러보고 돌아보니 자신 스스로 빈민이 되어 있었음을 깨닫고 조금은 씁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농촌의 농민들이 빈민이 아니고 귀농인 역시 운동가도 아니지만, 새겨두어야 할 대목입니다. 귀농인은, 그것도 귀농하자마자 농민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평생 그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 자체도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귀농인의 의식에 자리한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중성은 그것대로 소중한 덕목입니다. 다만, 농촌에 디딘 발이 굳건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과제에 충실히 답해야만 합니다. 그 첫 단계가 합리적인 거주여건 마련이고, 그 중요성의 인식입니다.


“세계가 바뀌었다.” 귀농은 단순히 이직이 아니고, 이사도 아닙니다. 세계가 바뀐 만큼 세계관도 새로 짜야 합니다. 그에 걸맞은 편제가 원정대 정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근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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