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2)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 / 기사승인 : 2020-01-04 09: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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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교육 독립운동

지난 12월 12일 울산시교육청 외솔회의실에서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 역사포럼이 열렸다. 울산시교육청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일제강점기 울산 교육현장에서 이뤄진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발굴하고 기념하는 사업을 벌여왔다. 이를 위해 울산교육 독립운동연구회를 구성하고, 2월 27일 중구 병영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울산교육청, 울산초등학교, 울산노동역사관, 보성학교 터, 언양초등학교에 울산교육 독립운동 모바일 페이지로 연결하는 QR코드 현판을 설치했다. 역사포럼은 1년 동안 진행해온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성과를 공유하고 과제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병길 양산 보광중학교 교사의 ‘언양 공립보통학교 출신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 이현호 우신고 교사의 ‘근대 울산지역 교육 상황 연구’,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의 ‘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 원영미 울산대학교 강사의 ‘1910년대 울산지역 학생의 인적 구성과 식민지 교육’, 김정숙 무룡고 교사의 ‘울산교육 독립운동사를 활용한 지역사 현장 체험학습 방안 모색’,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울산교육 독립운동 100년의 빛을 QR코드로 연결하다’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김용 울산현대고 역사교사의 ‘일제강점기 울산교육 독립운동’을 지면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울산 교육의 구심점, 울산공보와 울산청년회 야학운동
 

 

▲ 야학에서 가장 많이 교육됐던 것은 조선어와 산술이었다. 일본어와 한문도 가르쳤지만 조선어의 비중이 두 배 가깝게 높았다. 아예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은 곳도 많았다. 이는 조선어 말살정책에도 민중교육기관으로 조선어를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례로 보통학교에선 일본어를 국어로 칭했지만 야학에서는 일본어로 정확히 불렀다. 그림=울산교육청



과거 조선시대 통치의 중심 지역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식민통치의 핵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동헌은 울산군청, 그 부속 건물에는 경찰서, 재판소, 면사무소, 우체국이 들어섰고, 동헌 뒤쪽으로는 울산신사, 양사재가 있던 곳은 일본인들이 다니는 울산심상소학교가 자리 잡았다. 울산도호부 객사인 학성관에는 사립 개진학교에 이어 1907년 울산 최초의 공립학교인 울산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해 1911년 제1회 졸업생 남자 23명을 배출했다.


울산공보는 김홍조(김택천 개진학교, 동생 2회 김홍목, 4회 김말수, 9회 김흥구), 오경일(2회 오덕상, 3회 오의상, 6회 오두상), 조임준(여자 3회 조봉생, 4회 조기홍), 김정국(3회 김활천), 설령(3회 설두하, 7회 설근하), 송태관(6회 송석봉), 김좌성(10회 김재문), 윤경수(13회 윤덕조) 등 유력자의 자제들이 다녔고, 1923년 지역민의 기부로 서양식 2층 교사를 신축했다. 학교 정문으로 이용하던 태화루 2층에는 울산 최초의 도서관을 개관했다.


1911년 사립학교 규칙이 제정되면서 전국적으로 2000여 개에 달하던 사립학교가 대폭 감소하는데, 울산공보 제5회 학적부를 보면 문을 닫은 사립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울산공보로 재입학하는 상황을 알 수 있다. 강동면 흥륜학교(김현택, 최현진, 유문필), 두동면 일성학교(황선운, 변인석), 일산동 보성학교(최익호), 외남면 융흥학교(박재상), 웅촌면 원성학교(호경희, 손영송), 현남면 영신학교(박주열), 농동면 명진학교(최남규), 온북면 개양학교(오찬근), 양산군 통도사교(김병규, 박성렬) 등이 있다. 이밖에도 서생면 생명학교(6회 정봉조), 외남면 원창학교(6회 신영안), 울산학습소(여자 6회 박정이), 범서면 굴화리 진명학교(11회 오이상), 구영리 입신학교(11회 김재인, 김태룡) 등 여러 사립학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울산공보는 1922년 3월 12회 졸업생부터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이 6년이었다. 이미 4학년 공보를 졸업한 학생들은 입학해 5, 6학년만 다녔는데, 12회 졸업생의 다수가 이에 해당했고, 13회 졸업생 윤덕조는 동면공보, 14회 김지순, 이윤옥, 송말순은 사립일신학교 2학년에 다니다가 학성공보 3회로 졸업하고 다시 울산공보를 졸업했다.


울산공보 졸업생들은 울산청년회, 야학운동, 신간회와 근우회 등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울산청년회가 박병호, 손정수, 박향묵, 임태규, 이종천 등을 중심으로 창립하고, 1921년 울산청년회관이 울산공보 뒤쪽에 마련되면서 이곳은 각종 단체들의 모임과 행사 장소가 됐다. 울산청년회는 김문성, 박창수, 오흥호 등 교사를 중심으로 울산노동야학을 개설했고, 1923년 창립된 통도사 울산포교당의 울산고등강습회가 경영난으로 운영이 곤란해지자 1925년 학교명을 해영학원으로 고치고 중등교육기관을 개설했다.


2회 김상헌은 신간회 울산지회 서기장(1930)과 경남 울산노동조합 임시집행부 위원장(1930~1933)을 역임했고, 울산체육협회를 창립(1932)해 회장을 맡았다. 오덕상은 울산유치원기성위원으로 의연금 1000원을 냈고, 동아일보 울산지국 주최 신년간담회에서 읍과 병영 중간에 공설운동장을 건설하자고 건의(1933)했다. 3회 오의상은 병영청년회 상무위원과 병영청년회관 건축에 의연금 500원을 냈고, 병영청년회 회장(1925), 울산성우회 집행위원(1925), 경남도청년연맹 울산 대표(1925), 병영청년회 혁신총회 집행위원(1926)을 지냈다. 김활천은 경성제1고보를 졸업하고 울산공보 교사와 신간회 활동을 했다. 울산노동조합장(1934), 울산어채위탁판매조합장(1934)으로 활동했고 의형 조형진과 더불어 대현면에 대규모 과수원을 운영해 ‘울산배’를 시작했다. 4회 차덕출은 울산청년회 대표(1925)를 맡았고, 서원출은 졸업 후 일본 와세다고에 진학 후 재외 울산유학생 초대회(1925), 외지 유학생 150여 명 학우회 임시의장으로 활동했다. 울산청년회관에서 ’우리 문화 향상에는 교육이냐 산업이냐‘를 주제로 안효식, 박기상, 전석주, 이미동 등과 대토론회(1927)를 열기도 했다. 박현호는 1920년 울산청년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지낸 박병호의 동생으로 울산청년회 혁신회 위원장(1925)을 비롯해 울산청년회를 대표하는 활동을 벌였다.


6회 졸업생 송석봉(송석하)은 일제강점기 민속학자로 철원 도피안사 철불 뒷면에 있는 글을 발견(1931)했고, 박정업은 박현호와 더불어 1920년대 중반부터 울산청년회 활동을 했다. 14회 김지순은 근우회 울산지회 위원장으로 왕성히 활동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승하하자 울산공보 생도들은 봉도의 뜻으로 하루 휴학을 요청했다. 하지만 학교가 응하지 않자 5월 1일 2학년 이상 생도들이 일제히 휴교를 하고 교정에 2000여 명이 모여 망곡하며 일주일간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울산군청이 지정해 6월 10일 일반 민중이 망곡식을 거행하며 휴학했다.
일제강점기 때 공립보통학교가 수용하는 학령아동은 전체 30% 미만이었고, 수익자 부담이라는 명목으로 입학 때 교과서 비용, 교구비 및 잡비로 10원 정도를 냈으며, 한 달에 50전~1원의 월사금을 내야 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동, 여자, 노동자,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은 1920년대 청년회 활동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야학은 수업료가 없거나 10~20전이었고, 교사들은 거의 무보수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되는 노동야학, 일반야학, 부인야학은 80여 곳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존재했다. 모든 야학의 성격을 민족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활동가들은 문맹 퇴치와 입학난 해결을 위해 야학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지역 청년회가 주도한 야학은 강연회, 영사회, 학예회, 음악회 등을 통해 민중의식을 각성시키는 교육현장으로 활용됐다.


1929년 신간회 울산지회 정기총회에서 문맹 퇴치 운동 촉진 및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노동야학 총연합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언양 방면 6개 면의 70여 야학회는 연합대회를 언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언양과 두서, 두동에 80여 개, 울산군내 100여 개 야학회가 존재했다. 1929년 2월 3일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신영업의 개회사로 노동야학연합회가 결성됐지만, 2월 15일 울산경찰서는 울산노동야학연합회 대회 금지와 결성된 언양연합회에도 신간회원의 간섭은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후에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통보한다. 비록 연합회는 결성되지 않았지만 1929년 5월 조선일보, 울산청년회, 병영청년회, 울산 신간지회 후원으로 울산역전 광장에서 야학 500여 생도가 대운동회를 열었다. 1930년 5월에는 운동회도 허가하지 않아 천도교, 병영, 산전, 불교, 역전(驛前) 다섯 곳의 야학생 350여 명이 학성공원에서 연합 원유회(園遊會)를 개최했다. 1932년 5월 1일 어린이날에도 울산청년동맹 운동장에서 500여 명 이상의 야학생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 표어를 쓴 큰 기와 천여 개의 작은 기를 들고 울산읍을 일주했다.

활발한 소년회, 청년회 활동과 언양공립보통학교
 

▲ 1931년 언양 어린이날 기 행렬. 사진=울산교육청


언양은 1914년까지 울산과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동남쪽으로 치우친 울산과 달리 경주, 울산, 양산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다. 1924년 울산 태화강에 최초의 다리인 삼호교가 준공되기 전까지 울산의 범서, 웅촌 등은 울산보다는 언양이 더 접근하기 쉬웠다. 1906년 사립 영명학교가 1911년 언양군 사립보통학교로 바뀌었고, 1913년 언양공립보통학교로 새 건물에서 개교해 1915년 1회 1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일제강점기 언양공보 졸업생 중 주요 인물을 보면 1회 김원룡은 1920년대 초 중남면장을 역임하면서 명망이 높았던 김효동의 아들로, 졸업 후 동래고보생으로 동래 만세운동에 참가해 8개월 형을 받았고, 이후 언양청년회, 사시회, 신간회 울산지회 언양분회에서 활동했다. 최한홍은 언양 만세운동에 참여해 6개월 형을 받았다. 2회 강대곤(일명 강철)은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중등학교 재학 중 3.1운동으로 중국 상하이를 왕래했다. 1924년 2월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김천해와 함께 활동했다. 병영청년회(1925), 울산청년동맹 결성과 관련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1928~29)됐다. 신영업은 언양소년회, 자오회, 언양남부농민회 간사와 언양노동야합회연합회 회장를 지냈고, 언양기생조합 설치 반대와 신간회 양산지회 활동을 했다.


3회 신학업(일명 신주극)은 졸업 후 일본 게이오대학 야간부에 다니다 2.8 독립선언에 참여해 퇴학당한 후 상해임시정부 국내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귀국 후 울산소작인회, 언양청년회 노동야학, 언양소년회를 창립했다. 언양청년동맹, 신간회 울산·양산지회 등 언양을 대표하는 활동가였다. 6회 신말찬(일명 신고송)은 잡지 <어린이> 투고와 동시 및 프로문학 활동을 했다. 7회 이동개(일명 이동계, 학적부 이야개)는 신학업과 더불어 언양소년회, 언양청년회를 대표하는 활동가다. 11회 오영수는 소설가로 유명하다. 이관술의 동생인 14회 이순금은 동덕여고보 반제동맹(反帝同盟) 책임자로 박진홍, 이효정 등과 서울여학생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언양은 1919년 4월 2일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이다. 시위가 전개된 장터는 언양공보와 멀지 않은 곳이다. 시위 가담자 언양공보생 1회 최한홍은 6개월, 김원룡은 8개월 형을 받았다. 시위를 주도한 천도교 언양교구장 김교경, 휘문의숙 동기인 이규장과 이무종은 상북면 천도교회관에 양정학원을 운영했고, 김원룡, 곽해진, 이규경, 김만출 등 관련자들은 이후 소년단과 청년회, 야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언양은 읍 안에서는 1920년대 전반부터 김기오를 중심으로 신영업, 신학업, 이동개 등 언양청년회와 소년회가 중심이었고, 읍 밖에서는 이규경, 이무종, 이규장 등 시대청년회가 활동의 중심이었다.


1923년 언양소년회와 언양노동야학, 1924년 언양부인야학을 창립했다. 당시 언양의 분위기는 방정환의 글에 잘 소개됐다. 새벽 다섯 시 12~13세 되는 어린 소년이 부는 나팔 소리에 언양소년단과 불교소년단원들이 일어나 언양보통학교 앞 청년회관 마당에 모여 60여 명이 마을 먼 곳까지 달음질을 하고, 어린 소년들의 행동이 온 마을 사람들을 깨우며 언양에 새로운 기운을 넣어주고 방정환의 마음을 채찍질한다고 표현했다.


언양에서는 언양공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 차례의 격문사건이 있었다. 6학년 김동하는 1928년 12월 12일 밤 언양 경찰관 주재소 게시판에 “조선소년들아! 일본인을 타도하여 조선을 회복하자! 조선독립만세!”라는 글과 태극기를 그린 선전 문서를 붙였다. 이 사건으로 언양소년회 지도자 이동개, 언양농민조합 간부 오문영, 언양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신학업, 신영업 등이 검거되고, 언양보통학교 다수의 학생들이 매일 4~5명씩 울산경찰서로 호출돼 조사받았다. 언양공보 6학년이자 언양소년회 간부인 김동하(19)와 이동개는 이 사건으로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동개가 부산형무소에서 나와 언양에 도착할 때 언양소년회원 등 100여 명이 비를 무릅쓰고 소년회가를 높이 부르며 소년회관까지 행진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 1930년 1월 28일 언양주재소 부근에 격문이 살포됐다. 이 사건으로 언양소년회원 7~8명 검거됐고, 사회단체 회관과 검속자 가택수색이 실시됐다. 오영수의 셋째 동생 오호근(14회)이 체포돼 부산으로 이송됐다. 오호근은 1930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아침 언양 여러 곳에 붙인 격문으로 신학업, 이동개, 박성우 등이 체포됐다. 하지만 격문을 붙인 사람은 홍정수(19, 홍인수)인 것으로 밝혀졌다. 홍인수는 구류 25일, 박성우 이동개, 신학업은 구류 7일의 처분을 받았다.


다른 곳보다 활동 영역이 좁은 언양에서 지속적으로 세 차례나 격문사건이 일어난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이 때문에 언양청년회와 언양소년회는 집중적인 감시의 대상이 됐으며, 12년간 유지되던 언양농민야학이 1931년 강사가 불온하다며 폐쇄 당했다. 신영업은 언양노동야학연합회 창립대회 회장을 했지만 불허 명령으로 이동개와 함께 활동 무대를 양산으로 옮겨 신간회 양산지회, 양산농민조합을 하다가 양산농민조합의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신학업도 양산농민사건 이후 경남적색농민조합 동부위원회 조직책 울주군 책임자의 정체가 드러나 징역 2년을 받고 출소 후 경주로 이사했다. 이동개는 1935년 울산독서회 적색 비밀결사사건으로 1937년 징역 2년을 받았다.


김용 울산현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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