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을 뚫고 간 순백의 한라산

노진경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교육팀장 시민기자 / 기사승인 : 2020-02-05 09: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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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산행

올해 둘째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식구며 친구 같기도, 엄마 같기도 했던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남기고 저녁식사도 맛나게 드신 뒤 그 다음 날 서서히 숨을 거두셨다. 정확한 병명이 없는 죽음. 외할머니는 우리 할머니가 죽을 복이 있다고도 하셨다. 생의 도처에 죽음이 놓여있었는데 얼마나 그것을 망각하고 살았던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했다. 할머니가 한 줌의 재(실제로는 못해도 열 줌)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허나 죽음을 가까이 만나고 나니 도리어 생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 여유로워진 듯하다. (사랑하는 김춘자 여사님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중국 우한 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세상의 모든 이에게 죽음을 상기하게 해주고 있다. 요즘은 공공장소에서 기침소리만 나도 모든 이목이 집중된다. 죽음은 언제나 도처에 있었는데도 이번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에 유난스럽게 공포를 주고 있다. 조심하고 대비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허나 이 사회에 만연한 공포는 아마도 생과 죽음이 착 붙어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기 때문 아닐까?


설 연휴가 끝나고 벗들과 제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두려움이 컸던 그들은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이상기후가 우리의 생을 위협하더라도 일상을 살아가리라. 필자는 홀로 제주로 향했다. 물론 예방을 위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손소독제를 챙겼다. 

 

▲ 정상에서 성판악으로 내려가는 길

 

산행에 서툰 지인들과 함께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관음사-백록담-성판악(총 18.3km)으로 행로를 잡았다. 제주에 도착한 날부터 비가 내렸다. 5℃를 웃도는 날씨로 바람이 보드랍다. 한라산의 설경을 기대했으나, 산행 시작도 전에 약간의 실망감이 자리했다. 이상기후 때문인지 올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 


산행을 시작하는 아침,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그득 담고, 컵라면과 간식을 챙겼다. 관음사로 향하는 길,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소나기가 쏟아진다. 관음사매표소 입구에 도착하니 눈님은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아이젠과 게이터를 챙겼다. 겨울산행에는 눈이 있든 없든 고생하지 않으려면 아이젠이 필수다. 

 

▲ 간식으로 눈밭에서 먹은 한라봉


관음사 탐방로 입구에 서서 오늘의 마음가짐을 점검한다. 걷는 동안 찰나에 깨어있기를, 세상의 모든 고통 받는 모든 존재들(호주의 산불피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 등)의 평화를 빌 수 있길. 두 가지 서원을 세운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 덕이었을까. 얼마 오르지 앉아 빗방울은 작은 서리알갱이로 내린다. 탐라대피소에 도착할 쯤엔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산하는 봄기운이 완연해도 역시 산 속의 겨울시간은 한 걸음 느리다. 

 

▲ 관음사탐방로 용진각 현수교 인근
▲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활한 눈밭의 한라산은 흡사 우주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출발 시 때때로 쏟아졌던 소나기는 눈으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했다. 거듭 내리는 눈으로 길 위가 소복하다. 다른 탐방로에 비해 비교적 사람이 적게 다니는 관음사 탐방로는 적은 인적 덕에 포슬포슬한 눈을 밟을 수 있지만, 걸음을 옮기기엔 적잖이 힘이 든다. 다져지지 않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니 허벅지 앞쪽의 근육이 뭉쳐온다. 그래도 묵묵히 걷는다. 뭉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으니 감각은 있어도 걷기엔 문제가 없다. 걷다보니 뭉친 근육도 어느 사이 풀어졌다. 힘들면 쉬어가고 경치에 감탄하며 온통 하얀 세상을 묵묵히 걸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흑백의 세상을 걷고 있자니 ‘흡사 우주에 간다면 이런 기분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고 미약하나, 한없이 평화롭다.

 

▲ 용진각대피소 옛터 인근 탐방로
▲ 관음사탐방로 입구


삼각봉대피소에서 한숨 돌리며 배낭에서 초콜릿을 꺼내먹는다. 쉬어가는 또래의 여자일행이 보인다. 혼자 먹기에 많은 초콜릿을 나눠먹는다. 초콜릿을 주는 이나 받는 이나 경계가 없다. 순백의 산정은 바이러스에 대한 걱정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 구상나무의 귀여운 상고대
▲ 삼각봉대피소 뒤로 어렴풋이 삼각봉이 보인다.


정상에 도착하니 여전히 세상이 하얗다. 비바람이 거세져서 한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 정도다. 정상에 있는 백록담의 위치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갔지만 백록담을 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어쩌랴 세상은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어느 오래 전 가수의 노랫말이 흥얼거려진다.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노래를 흥얼거리니 기분이 한결 더 좋다. 

 

▲ 용진각대피소 옛터 근처에 있는 탐방로
▲ 한라산 정상 뒤로 백록담이 있으나 전혀 보이지 않는다.
▲ 한라산의 겨울 상고대


정상에서 성판악으로 하산하는 길에 머리 밑이 파란, 막 전역한 청년 세 명이 아이젠도 없이 운동화를 신고 장갑도 없이 아슬하게 미끄러지듯 하산 중이다. 그들을 보는 순간, 어느 겨울 산행에서 아이젠이 고장 나서 당혹스런 일을 당하고 난 뒤 항상 대비로 가지고 다니던 배낭 속 여분의 아이젠이 생각났다. 걸음을 멈춰 아이젠을 건넨다. 청년들은 고맙다며 이것을 어찌 전해줄지 물어본다. “나중에 산을 걷다 당신네들 같은 이를 만나면 또 전해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청년들이 거듭 고맙다고 한다. 배낭도 가볍고 마음도 무엇인가 가볍고 상큼하다. 나도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겨울산행 Tip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산행에서는 방풍이 가능한 복장이 필수다. 걷는 동안 몸에서 열이 계속 나기 때문에 두껍게 입어 땀을 내는 것보다 방풍자켓으로 바람은 막고, 적당한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굴과 손 등의 방한도 필수. 안전을 위해 산하에 눈이 있든 없든 게이터와 아이젠을 배낭에 꼭 챙겨 다니시길.

* 2020년 2월부터 정상으로 향하는 성판악, 관음사 탐방로는 사전예약이 필요하다. 한라산 훼손 방지를 위해 성판악 1000명, 관음사 500명으로 일당 탐방객 수를 한정하고 있다.

노진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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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경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교육팀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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