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언양 지역의 활동가가 되다(1)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11-27 09: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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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에서 일제강점기에 가장 활발하게 항일계몽과 항일독립운동을 한 지역은 언양이다. 언양읍성터에 자리한 언양공립보통학교(이하, 언양공보) 의 출신들이 그 주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언양공보 출신의 학적부를 통해 1915년 1회부터 1930년 15회까지 졸업생들의 사회활동을 현황을 알아보았다.
 

▲ 언양공립보통학교 학적부(1회) 표지(울산교육청 제공)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1906년 4월 1일 사립영명학교가 만들어졌다. 1911년 7월 1일 언양사립보통학교로 개명하고,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가 1913년 3월 13일 언양현 동헌 객사 터 옆에 개교하면서 언양공립보통학교가 시작됐다. 학교 앞은 바로 영화루였다. 현재 남문길은 언양읍성 마을 길이고 일제강점기 언양의 중심지였다. 남문길 일대가 일제강점기 언양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삶터였고 항일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1919년 4월 2일 언양 장날에 상북면 지역의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남천교 삼일운동기념비가 있는 언양 바깥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남문 길을 따라 영화루 방향으로 진행됐다. 남문 길은 독립만세의 물결로 넘쳐났다. 일제 경찰은 영화루에 올라가 총을 쏘았다. 맨 처음 쓰러진 사람은 복덕이 엄마 손이뿐(孫粒分) 여사였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다음에는 독립운동의 주모자인 곽해진의 어머니 길천댁의 다리를 관통했다. 김종환은 두 손가락을 잃고, 정달조도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언양 독립만세운동에 언양공보 학생과 졸업생들이 참여했다. 재학생은 알려진 바 없지만 1920년 3월 졸업생이 그 이전 해보다 25명이나 적었다는 사실은 어떤 숨은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언양공보 1915년 1회 졸업생인 최한홍은 언양 만세운동에 참여해 징역 6개월을 복역했다. 또 1회 졸업생인 김원룡은 동래고보 3학년으로 1919년 3월 13일 동래 만세운동에 참여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8개월을 복역했다.
 

▲ 언양보통학교 전경

언양 사회운동의 중심, 언양청년회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민족주의 이념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이 국내로 유입됐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 대회를 계기로 “청년단체는 다수자인 무산계급 및 노동계급 해방의 선구가 되어 민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을 표방했다. 언양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은 일본 유학과 상해 임정에서 활동한 신학업(신주극, 3회)에 의해 이뤄졌다. 그가 언양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청년회의 활동 방향도 항일독립운동으로 본격화됐다고 할 수 있다.


언양 만세운동은 언양읍 밖의 사람이 주축이었지만, 만세운동 이후 사회운동의 중심은 언양 안으로 변동됐다. 언양청년회를 중심으로 항일계몽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이 이뤄졌다. 언양청년회는 보통학교 남쪽 영화루 왼쪽 100여 미터에 있었다. 언양소년회와 야학, 체육대회와 소인극, 음악회, 강연회 등등 모든 것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1920년대 언양청년회는 신문화보급운동으로 지방순회강연대와, 신파극 연예단을 조직해 순회강연을 했다. 또 노동야학을 운영했으며 인근 지역 노동야학의 경영난을 해소하기 위해 연예단 활동을 통한 수익금을 기증했다. 청년회는 1935년까지 있었다. 초창기 구성원을 보면 1회 졸업생인 최수한, 박시하, 최한홍, 김원룡이 참가했고, 2회는 신영업, 정인목이, 3회는 신학업(신주극), 4회는 김남주 등이 주축이었다. 이후는 언양소년회 구성원들이 청년회의 자리를 메꿨다. 


1921년 8월 11일부터 언양청년회에서는 신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지방순회강연대’를 파견했다. 연사는 김기오, 신학업(신주극, 3회), 오락영, 김남주(4회)였다. 1923년 8월 16일 언양청년회는 종래의 회장・부장제를 간사제(幹事制) 변경하면서 간사들을 새로 선출했다. 서무부 간사는 김원룡(1회), 최한홍(1회), 오보근, 위원길이고 재무부 간사는 정병호, 김갑주(사립영명학교), 노병철, 김기오였다.
 

▲ 언양청년동맹 집행위원, 1928년 6월 3일.(이동개의 아들 이건욱 제공)

언양소년회, 사회운동가로 자라다

1923년 10월 6일 ‘언양소년회’가 결성됐다. 언양청년회의 신주극(신학업, 3회)이 개회사를 했고, 최수한(1회)이 취지 설명을 하며 결성식을 주도했다. 임원은 신말찬(신고송, 6・10회), 이명돌(5회), 김노시(5회), 하창윤(9회), 김용대(5회), 정홍조(8회) 등이었다. 단장은 김기오였다.


5회 졸업생(1919.03.23)이 주축인 이유는 그들이 바로 1919년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참가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 알려진 사람은 이야개(이동개, 7회), 정홍조(8회), 김경택(8회), 김두이(9회), 신근수(8・10회), 신돌이(신시돌, 9・10회), 하창윤(9회), 하봉철(10회), 오영수(11회), 오호근(14회), 박복순(14회) 등이다. 


1924년 8월 7일 언양소년소녀현상웅변대회가 언양청년회와 소년회가 중심이 돼 열렸다. 1등은 “가정교육의 맛을 보여주시오”의 신말찬(10회), 2등은 “소년부터”의 하창윤(9회)과 “광명의 길”의 신근수(10회)가, 3등은 “무엇보담 배워야 하겟다”의 김경택(8회)과 “여자의 해방”의 김두이(9회), “여자도 사람이다”의 정복순이 각각 수상했다. 신말찬(신고송)은 당시 언양조기회 운동을 결성하고, 가극대회를 준비하는 등 가장 열성적으로 소년회 활동을 했다.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이 언양에 오도록까지 했다. 방정환은 “모든 것이 모두 쇠잔한다 하여도 온갖 것이 모두 망한다 하여도 언양에는 새로운 기운을 넣어주고 격려하면서 씩씩하게 커 가는 소년단의 어린 동무들이여, 꾸준히 꾸준히 씩씩하게 장성하소서!”라는 격려의 글을 남겼다. 훗날 신말찬은 9회 졸업생 김두이와 결혼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2등을 한 신근수는 작청정 맞은편 야산에 청사대를 만든 언양청년회 마지막 회장이었다. 정복순은 정인목과 정인섭의 여동생이다.
 

▲ 경남도 소년연맹설립대회 기념 사진(1928.7.8.)-밀양 영남루(이건욱 제공)

어린이날 깃발을 들고 행진하다

언양소년회는 소년회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운동회와 가극대회를 열었는데 노동야학생과 여자야학생도 참가했다. 1925년 5월에는 조기회를 조직해 아침 4시부터 30여 명의 소년군이 청년회관에 모여 시내를 한 바퀴 돈 후에 장거리 경주를 했다. 1925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맞이해 단원들이 시내를 순회하면서 선전문 수천 장을 살포하고 기념대회를 열었다. 1931년 어린이 날에 제등행렬은 제지당하고, 기념식과 행렬만 허용됐다. 10시에 언양청년동맹 운동장에 280여 명의 소년소녀들이 모여 기념식을 하고 악대를 선두로 해 각종 표어 깃발을 높이 들고 어린이날 노래와 만세를 고창하며 언양읍을 돌아다녔다. 다시 운동장에 모여 여러 가지 유희를 한 후 4시에 해산했다. 


1927년 언양소녀회의 오덕선(11회)이 동아일보에 동시를 발표한 것으로 보아, 언양소녀회도 그 이전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언양 인근에 있던 소년회와 소녀회를 연결하는 운동이 있었다. 1926년 5월 30일 ‘언양소년소년연맹’의 제1회 정기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임시의장 윤수암(尹壽巖, 6회)에 의해 진행됐다. 집행위원으로 언양소년회의 이동개(이야개, 7회), 언양소녀회의 한덕복(여, 9・10회), 언양불교소년단의 방기현(6회), 언양불교소년회 1인, 중남소년단 윤수암(6회), 중남소녀회 1인, 중남유년단 1인, 두서소년단 1인, 구량소년단 1인, 삼동소년단 우재식, 삼남소년단 이종인 등이었다. 검사위원은 김기오, 심수학(11회), 오덕선(여, 11회)이었고 상무집행위원은 이동계(7회), 윤수암(6회), 한덕복(여, 9・10회)이었다. 그 뒤 1926년 8월 12일 김명진(여, 9회)과 신수근(8회)을 집행위원으로 증선했다.


이동개가 남긴 사진을 보면 ‘언양청년동맹’은 1928년 6월 이전에 결성됐다. 집행위원장은 신영업(2회), 신학업(3회) 형제였다. 1928년 3월 신간회 울산지회가 조직됐는데, 언양지역에서는 신학업(신주극, 3회), 이규정, 정병택이 참여했다. 1930년 4월 26일 ‘신간회 울산지회 언양분회’가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결성됐다. 창립 분회장은 신학업(신주극, 3회), 집행위원장은 이규경, 이동계(이동개, 7회), 정병택, 김교홍, 성헌장, 정태균, 김용대(5회), 김정학, 최양수(1회), 김원룡(1회), 이무종, 신은수(申銀秀/신근수?, 8・10회)였다. 검사위원은 오문영, 위원은 김대식, 정태익이었으며 지회대표원은 이동계, 오문영, 성헌장, 정태균, 최양수, 김용대였고 후보는 신주극, 이규경, 정병택이었다.


언양 이외의 지역에서 청소년 활동을 한 졸업생으로 중남청년회에 오태영(2회), 두서소년회에 배기철(13회), 양산청년동맹에는 신영업의 동생인 신동업(11회), 울산청년동맹에 강대곤(강철, 2회), 울산소녀회에 한덕복(9・10회) 등이 활동했다.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이관술의 여동생인 이순금(14회)은 여성노동운동가로 경성트로이카와 연관돼 활동했다.

 

▲ 1931년 5월 3일 언양소년회의 어린이날 기 행렬(이건욱 제공)

정치적 목표가 뚜렷한 운동에 가담하다

언양읍 안과 밖의 사람들은 독립만세운동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언양 밖이 천도교 중심이었다면, 언양 안은 언양청년회 중심이었다. 만세운동 이후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운동 노선의 변화가 뚜렷했다. 두 지역은 경쟁하면서 발전해나갔고 나중에는 교류했다.


1924년 3월 29일 39명의 발기로 ‘언양 무산자 동맹’이 작천정에서 결성됐다. “무산계급의 의식에서 발생한 절실(切實)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자본가의 철쇄(鐵鎖)에 신음하는 동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언양청년회와 무산자동맹은 ‘농민의 서광(曙光)’, ‘걸인의 재판’ 등의 소인극을 했는데, 이는 무산자의 환경과 노농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보면, 참여 명단은 확인되지 않지만 김기오, 신영업, 신학업 등 언양청년회 활동가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 3명은 언양청년회, 언양소년회, 언양소년소녀연맹, 언양청년동맹, 신간회 울산지회 언양분회, 언양농민조합, 언양야학회 등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학업은 2.8독립선언운동, 상해임정 조사원 활동,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잡지 발행을 한 경험 등을 놓고 볼 때 언양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다. 훗날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만들고 현대문학을 창간한 김기호는 언양 사회・청년운동의 대부였다. 


읍 밖인 현재의 상북면 지역에서 1924년 4월 하순 40여 명이 단합해 ‘시대청년회(時代靑年會)’를 결성했다. “의식개발, 계급타파, 노동본위”의 강령을 가진 계급노선의 이념을 표방했다. 집행위원은 이규경, 강영상, 정일수(3회), 이무종, 정장수(3회), 정재홍, 김대식, 김택선(金澤善/김선택, 5회), 이재호(3회), 이규장 등이었다. 

 

▲ 1915년 제1회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12명 중에 7명이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읍 안에서 1925년 5월 3일 ‘사시회(四時會)’가 창립됐다. 회장은 언양 4.2 만세운동의 주역인 천도교인 곽해진이었고, 총무는 김기오, 회원 이규장, 이무종, 황선운, 유철순, 김원룡(1회), 윤동명 등이었다. 이들은 언양읍에 조선일보 언양지국을 경영하며 신문화 운동을 벌였다. 1923년 12월 지국장은 곽해진, 총무 겸 기자는 김기오, 기자는 김원룡(1회)과 김동수, 보급은 오영수(11회)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병길 시인, 울산 민예총 감사, 역사 질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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