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고, 도발하고

강현숙 시인 / 기사승인 : 2019-10-16 09: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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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요즘 아침에 산에 갈 때마다 소나무에 가만히 기대선 채 하늘을 바라보다가 내려오는데 문득 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만약에 이 나무처럼 이 자리에 붙박힌 채로 어딘가로 떠날 수 없다면 그것은 참 엄청난 고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두 발로 움직여 걸어간다는 사실이 경이로워지는 것이다.


가을이다. 가볍고 경쾌하게 살아가는 일을 익힐 일이다. 심각하게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여유롭지 못하고 유쾌하지 못하고 시간을 부여잡는 일이라 이 가을에는 덜 심각해지리라 생각한다. 


시인은 과장을 하고 소설가는 거짓말을 한다. 과장 속에 드러나는 진실을 만나고 거짓말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는 표현보다 나뭇잎이 간밤에 몸서리쳤다라는 표현이 과장이긴 하다. 표현의 객관에서 나무라는 주체의 주관적 감정으로 넘어오면서 나뭇잎에 더욱 가까이 가게 되고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할 자연의 비밀에 접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시인이 시를 짓고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일 듯하다.


처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콩나물을 키우는 것을 기록하는 관찰학습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자라나는 콩나물을 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에 은유해 본 일이었다. 그 뒤로 기억이 희미하지만 내가 자란 마산의 용마산공원에서 글짓기대회가 열렸을 때 나비에 대해 글을 짓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내가 표현하려 한 일은 나비라는 그냥 훨훨 날아다닌다는 존재에 대한 무의식적 끌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로 여고 시절, 어느 초겨울 하루 첫눈 올 듯 잔뜩 찌푸린 하늘가, 주위로 컴컴하게 어둑어둑해져 올 무렵 마지막 수업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칠판에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 전문을 천천히 적으셨다. 


오랜만에 시 전문을 적어본다.


설야(雪夜)// 김광균(金光均, 1914~1993)//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나의 기억 속에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만 남았는데 지금 읽
어 보니 마지막 두 행이 이 시의 서정을 단단하게 붙잡았던 듯하다.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여고 시절에도 내 슬픔이란 것이 있었나 보다. 지금 보는 내 슬픔이란 묵히고 삭혀 내 슬픔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이 되어 무색, 무미, 무취한 것이 되어버렸는데 여고 시절, 그 시절의 슬픔은 아직 색이 입혀지기 전의 슬픔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머언 곳에서 들려오던 여인의 고독한 옷 벗는 소리를 그 하룻날에 분명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소리의 슬픔을 들었던 것이다. 슬픔이란 추상이 소리를 입었을 때 구체화되면서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막연하게 내가 시인이라면 하는 환상을 강하게 지녔던 것 같다. 


이후 습작 시절, 저돌적으로 삶의 태도를 지녀가던 나를 힘겨워하던 남편이 만류하려 들면 하던 말이 있었다. 나는 나를 기필코 찾아야겠다고 말이다. 그 시절 내게 시 쓰기란 나,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찌 그리 무모하게 불나방처럼 나를 향해 달려들었는지,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불태워버린 느낌이 들곤 한다. 그 뒤로 시의 깊이, 인생의 깊이를 생각했지만 시와 인생은 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심각하게 접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얼마 전 신동엽 시인의 시들에 매료되어 한동안 부여와 금강과 시인과 연결된 풍경에 사로잡혀 헤매다 이제사 겨우 빠져나온다. 시인의 정신에 대해 성찰하며 시인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저항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쩌면 의외로 세계를 부정하고 세계에 저항하며 세계의 흐름의 물꼬를 틀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저항하고자 하는 내면은 더 고요에 침잠해지고 가라앉아가며 주위에 잘 동요하지 않게 되어 가끔 나는 미동하지 않은 채로 하루에 얹힌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굳이 무엇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어딘가로 가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대상을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안다. 저항은 조용히 온다는 것이다. 저항은 부동의 자세로 자신을 바꾸어놓는다는 것이다. 저항은 안으로 그 바닥을 깊이 내려 고요하게 물길을 따라 금강처럼 오래, 멀리, 유유하게 물꼬를 틀기도 하며 흘러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위축과 도발의 간격을 뛰어넘으며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내게 도발이 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을 도발시킬지 그건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삶은 심각하게 내게로 왔으나 내가 삶을 떠날 때는 가볍게 떠날 일을 또한 생각한다.


강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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