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세운 여인들, 최송설당과 김울산 여사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기사승인 : 2019-12-26 09: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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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통도사 무풍한송 길에는 역사의 방명록인 이름바위가 참 많이 있다. 다비장과 청류정을 지나면 오른쪽 솔 숲 사이에 우뚝 솟은 이름바위가 있다. 아마 하마비 근처의 선자바위 정도는 아니지만 바위 곳곳에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바위 가장 높은 곳에 특이한 이름,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이 있다.
최송설당은 불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그의 이름이 경북 청암사, 법주사 복천암, 금강산 유점사, 표훈사, 정양사, 화왕산 도성암, 북한산 등에서 발견된다. 그만큼 그(녀)는 사찰에 시주를 많이 했다. 1926년 불교적인 범어로 가득한 한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사진을 찍었는데, 당시 신문은 ‘활불(活佛)’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육영사업의 어머니’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모은 32만 원의 돈을 경북 김천보통고등학교 설립에 기부했다. 그가 김천고보를 설립하기 전까지는 누구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 무풍한송 길 ‘솟은 이름바위’ 오른쪽 바위 정상에 최송설당 이름이 있다.


최송설당은 홍경래의 난으로 몰락한 김천의 양반 출신이었다. 그는 아들 없는 집에서 아들과 같은 역할을 부여받았다. 집안을 부흥시키고 조상을 신원시키는 것이 그의 최초의 목표였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몹시 빈한한 집안이었지만 부친으로부터 언문과 한문을 깨쳤고, 길쌈과 바느질품을 팔아 살며, 그것을 자본으로 밭을 사고 농사를 지어 돈을 벌고 장사를 해 부를 축적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의 시종원부경을 지낸 정환덕의 <남가몽>에 따르면, 어미가 너무 어려워 딸을 관기로 팔았다. 8살 기생 송설이의 미모 덕분에 아전이 그를 빼돌려 양민이 되게 했다. 그 후 배문옥의 첩이 돼 수천 냥을 돈을 벌고 재산문제로 다퉈 헤어졌다. 

 

▲ 1926년 최송설당. 그의 옷에서 불심(佛心)을 엿볼 수 있다.


1만 냥의 재산가가 된 설송이 만난 사람이 상주 출신 남편 이용교였다. 이용교의 벼슬을 사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왕자 점지 백일기도가 궁궐에 알려졌다. 아관파천한 러시아공사관에서 임신한 엄상궁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현몽과 함께 출산 물품을 바쳤다. 엄 상궁이 아들인 이은(영친왕)을 낳으니 최송설당은 보모가 돼 궁궐에 머물게 됐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와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훗날 엄상궁은 순헌황귀비, 엄귀비((嚴貴妃, 1854~1911)가 됐다.


이용교는 1896년 왕실의 회계원 출납과장에서 시작해 시종원 시종, 공사관 참사관, 궁내부 참사관, 일본공사 수행원, 비서승(秘書丞), 김해군수, 진주군수, 의령군수,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가 김해 창원 군수였던 1899년부터 1902년 사이에 부인과 같이 통도사에 와서 이름을 새긴 듯하다. 선자바위 위쪽에 ‘이용교, 곤(坤) 최씨’라 새겨있다. 1905년 진주목사로 있을 때 수만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1913년 김천에서 조선 물산의 중역을 지냈다. 솟은 이름바위의 최송설당은 왕궁에서 나온 이후 전국 사찰에 시주할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 


최송설당은 김천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김천의 동학란을 피해 1895년경 상경해 30여 년을 살고, 다시 1930년대 김천으로 되돌아왔다. 1901년 고종 광무황제에 의해 그의 조상들은 복권됐고, 조상묘소를 찾아 문중 현창 사업을 해 그의 숙원 사업은 끝났다. 1907년 6월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게 됐고 일제의 강요로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영친왕 보모로서의 역할도 끝났다. 

 

▲ 동상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가운데), 송진우(좌), 여운형(우).


최송설당의 부의 축적은 남편의 부정축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귀비와의 인연인 듯하다. 엄귀비는 영친왕을 낳고 나서 경선궁이란 궁호를 받고 많은 토지를 받았다. 영친왕궁의 땅도 경선궁으로 이관됐다. 하지만 일제는 황실의 권력을 약화하기 위해 황실재산을 국유재산으로 변경하는 사업을 제실재산정리국을 통해 진행했다. 이때 엄귀비는 일제에 재산을 빼앗기기보다는 학교를 짓는 데 사용했다.


당시 여학교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배화학당, 누씨여학교, 호수돈여학교, 전성여학교가 있었다. 모두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였다. 1906년 엄귀비에 의해 처음 조선 사람 손으로 세운 진명여학교(설립자 엄준원)와 명신여학교기 개교했다. 

 

▲ 엄귀비는 황실 재산을 이용해 육영사업을 했다. 명신여학교, 진명여학교. 양정의숙도 그가 설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카 엄주익은 1902년 군부협판으로 일본을 다녀왔을 때 통도사를 거쳐간 듯 그의 이름이 있다. 1905년 2월 엄주익은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 준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의 기치 아래 사재와 기부금 모아 ‘양정의숙’을 만든다. 안희제, 박상진, 손기정 등이 졸업했다. 양정의숙이 1907년 경영난에 빠지자 도와줬다. 엄귀비는 궁녀들도 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도록 했고,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줬다. 이런 와중에 아마 최송설당은 엄귀비로부터 땅을 하사받은 듯하다.


1926년 최송설당은 만해 한용운의 권고를 받아 해인사에 기부하려던 뜻을 접고 학교 설립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는 고향 김천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이 보통학교 이상을 다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고등학교 설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제는 본토와 달리 조선에서 소학교를 보통학교라 이름하고 조선인의 교육을 초등학교에서 끝마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특히 1909년 개정한 고등학교령을 통해 ‘중학교’를 ‘고등학교’로 명칭을 바꾼 것도 조선인의 교육을 대학교가 아닌 중학교 단계에서 마무리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 울산의 경우, 1933년에 겨우 ‘공립농업보습학교’가 설립되고 1937년 5년제 중등교육기관인 ‘울산공립농업학교’가 개교했다. 


송설당은 민족을 살려낼 인재를 양성하자면 실업학교가 아닌 인문계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20~30년대 중등학교 입시 경쟁은 상상을 초월했고 시골학생은 부자가 아니면 꿈을 접어야 했다. 결국 그는 사이토 총독의 아내를 통해 설득했다. 결국 일제는 고등보통학교 규정 일부를 개정해 인문계학교에 실업과목을 교과에 첨가하기로 하고 학교 설립허가를 내줬다. 김천고보는 1931년 개교했다. 그는 “적막(寂寞)의 김천을 활기(活氣)의 김천으로, 초야(草野)의 김천을 이상(理想)의 김천으로” 만들었다.


송설당 80세가 되는 1935년 11월 30일 김천고보에서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전국 각지의 성금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경북도지사. 학무국장, 동아일보의 송진우, 조선중앙일보의 여운형, 조선일보의 방응모, 설립 산파 역할을 한 이산 변호사 등 천여 명이 참석했다. 여운형은 축하연설에서 김천고보를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겼다. 그 오아시스에 우뚝 육영의 깃발을 세운 사람이 바로 최송설당이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4년 뒤 1939년 84세로 별세했다. 그의 동상은 청동상이었기에 일제의 공출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뜻은 유언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가 영원하도록 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한 사람이 동양을 지배한다. 이 길을 꼭 지켜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그런데 울산사람으로 최송설당처럼 육영사업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울산(金蔚山, 1858~1944) 여사다. 그(녀)의 이름이 울산이라 함은 울산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깊었다는 것이리라. 민속학자 송석하가 자기 호를 석남(石南)이라 한 것은 고향인 상북면 양등리 가까이 석남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 송태관의 이름이 석남사와 통도사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불교와 인연이 있는 듯하다. 아무튼 김울산의 삶도 송설당과 다르지 않았다.

 

▲ 김울산 여사(1943)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실질적인 가장이 되고, 대구로 시집갔지만 19세에 사별하고 ‘향’이란 이름의 관기가 됐다. 정미소와 술집을 경영하면서 부자가 됐다. 일설에는 흥선대원군과 가깝게 지내 땅을 하사받았다고 하나 알 수 없다. 육영사업가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최송설당과 마찬가지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김울산 여사는 1500석을 추수하는 부자로 보리 흉년 때 주린 동포에게 있는 곡식을 다해 나눠주었다. 홍수로 하천이 범람해 주민들이 재난을 당하자 사재로 둑을 쌓고 이재민을 구휼했다. 또 침산 지역 주민을 위해 나룻배를 건조해 통행을 돕기도 했다. 대구부가 도로를 닦을 때 많은 땅을 희사하는 등 총 37회에 걸쳐 사회사업에 헌신했다고 한다. 그(녀)는 소작인에게는 인심이 후했지만, 자신은 극도로 인색해 문풍지가 찢어지면 헌 종이로 때워 바르고 빗자루도 몽당비가 될 때까지 사용했다. 그(녀)는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누가 보든지 남의 심부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의복을 입고 다녔다. 그(녀)는 육영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대구사립명신여학교는 1910년 8월 26일 대한애국부인회에서 설립했다. 1911년 6월 천도교에서 경영하다가 1916년 8월 달성여학교와 합병했다. 1917년 2월 대구의 부호 이종면, 정해붕 외 10명의 부자가 설립자가 됐으나 재산을 투자하지 않아 학부형회에서 유지했다. 1922년 11월 1일 박기돈이 설립자로 경영하다가 1924년 3월 ‘사립희원학교’ 설립자인 대구 남성동의 서희원 여사를 설립자로 3000원 기금을 내놓고 경영했으며, 이때 서성동의 김울산 여사가 돕겠다고 했다. 


1925년 11월 김울산 여사가 명신학교와 달성유치원을 인수해 경영하게 됐다. 김울산 여사는 대구사립명신학교를 ‘사립복명여자보통학교’로 개명하고, 4월 24일 명치동 학교 안에서 개교식을 했다. 복명보통학교는 대구에서 최초로 여성이 설립한 초등학교였다. 이때 김울산 여사가 출연한 재산은 8만 원이었다. 복명(復明)은 ‘조국광복’의 염원을 담은 뜻으로 이때부터 자신의 이름도 복명으로 고쳤다. 그 후 그(녀)는 학교 운영비로 20만 원 상당을 기부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자보통학교는 이것 하나일 뿐이요, 여자 경영은 특이한 일이다”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1900년에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대남학교가 경영의 위기에 빠졌다. 1914년 서희원과 김순도 두 부인이 인수해 희원순도학교(남자학교는 대남에서 희원으로, 여자 학교는 신명에서 순도로, 1926년 희도학교로 통합)를 설립했는데, 대구 최초의 초등학교였다. 김울산 여사는 순도학교 건축비에 5000원을 지원했다. 대남(大南)유치원에 1000원 등 사회 각 방면의 공익사업에 기부를 매우 많이 했다. 

 

▲ 대구명신학교 경영에 참여한 김울산(우), 서희원(좌) 여사


김울산 여사는 사재 전부를 아낌없이 내놓고 육영사업에 한없는 재미를 붙여 이따금 학교에 나와서 손자 나이의 학생들이 장난하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송설당과 마찬가지로 서석제를 비롯한 대구의 유지들은 1935년 4월 13일 김울산 여사 83세 때 동상 제막식을 했다. 그때 그(녀)는 학교 운영 재원을 위해 6만 원 상당의 땅을 기부했다. 그(녀)의 동상 역시 일제의 전쟁 물자로 공출됐다. 하지만 평생 교육과 사회봉사를 위해 헌신한 ‘교육 기부의 어머니’의 활동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최송설당과 김울산은 선교사나 일본인이 아닌 자기 개인 재산 전부를 기부해 사립학교를 세워 운영했던 인물이다. 그들의 학교가 조선인의 계몽에 이바지했음은 분명하다. 성세빈이 세운 울산의 ‘보성학교’가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듯이. 사라진 보성학교 주변에 그 역사를 기리는 ‘보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가 세워지기를 기대해본다. 


이병길 시인, 울산 민예총 감사. 역사 질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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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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