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룸

조숙 시인 / 기사승인 : 2019-09-26 08: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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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보는 세상

비오는 방에 들어갔다. 깊고 어두운 밤, 빗줄기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하얗게 반사하는 빗줄기는 가슴속을 훑어 내리면서 나를 과거의 어느 날로 데려갔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늦은 밤까지 이어진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문득 헤어진 사람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던 순간. 차갑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집으로 들어갈 수도 다시 젖은 길로 나설 수도 없었던 가로등 아래. 누군가의 시에서 그려지던, 가로등을 붙잡고 토하고 있는 취객이 보이는 거 같았다. 약속하지도 않고,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던 그런 순간들을 그린 소설과 그림들이 떠올랐다. 


부산현대미술관의 레인 룸. 입장하자마자 빗줄기와 검은 사각형의 방과 가로등불빛이라는 단순한 구조 때문에 어리둥절했지만 곧 복잡한 순간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나의 어린 치기와 안타까운 젊음과 그 시기를 통과하던 열망이 전시되었다. 종로나 대학가에서 벌어지던 떠들썩한 술자리의 열기와 밤을 새워 벌이던 격렬한 토론, 어설프게 형성되던 지식의 대결, 미래에 대한 갈망, 운명처럼 느껴지던 만남과 헤어짐, 어리고 열정적이던 친구들의 얼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함께 추운 겨울바람을 걷던 단단한 손. 


빗줄기를 따라가면 비는 멈추고, 손을 내밀면 나를 스쳐 내리던 빗줄기가 더 멀어져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는 나를 중심으로 멈추고 저 멀리에서만 내렸다. 튀어 오르는 빗방울로 옷이 눅눅해질수록 갈증을 느꼈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첫발을 내딛던 두려움과 반대로 멀리서 바라봐야만 하는 빗줄기에 갈증을 느꼈다. 젊은 날의 격렬한 고통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져가는 것처럼, 평온한 삶의 조건들이 건조한 일상을 살게 하는 것처럼, 평온하고 고요하게 나이 들어가는, 젊음에 손을 내밀수록 멀어져가는 애잔한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 레인 룸에 함께 들어간 사람들은 초등학생 나이부터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아마도 자신이 그려낸 그림이나 감정들은 달랐을 것이다. 레인 룸을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빗물에 젖었는지 말을 하며 신나는 표정들이었다. 무언가를 느낀 사람들의 흥분이었다. 


예술의 역할은 삶의 이면을 들추어 보여주면서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일상을 반복하며 느끼지 못한 것들을 보게 한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지키려는 보수성을 흔들어 놓는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예술작품들은 전통적인 예술의 방식을 깨트리는 것들이라서 신선했다. 사실 신선하다고 느끼기 이전에 생경하고 고통스러웠다. 아름답게 느끼도록 훈련된 서정적인 예술품들이 아니었다. 예측한 적이 없는 것들이며 접한 적 없는 디지털 작품들이었다. 이런 생경함은 예술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비오는 방에서 가슴속을 훑고 복잡하게 떠오른 것들은 보수화된 예술세계를 흔드는, 불편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기계화된 예술품의 차가움에 힘들어하는, 애잔한 나의 보수적 감각- 젊음의 고통은 싫어하지만 젊음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을 만나는 행운들이었다. 


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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