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단독정부, 국가보안법과 국민보도연맹

배문석 / 기사승인 : 2020-02-28 08: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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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1945년 해방 이후 분단 상황에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선다. 북쪽도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동시에 출현한 상황이 됐다. 아울러 해방 후 강제로 그어진 분단을 극복하려 했던 세력들의 노력은 좌절됐다. 이념을 달리하는 미국, 소련 두 강대국의 군사분할 점령정책으로 시작해 해방 후 복잡하게 얽혀 성장한 정치세력간의 대립은 신탁통치 찬반대결 이후로 더욱 격화됐다. 그런데 북쪽보다 남쪽의 혼란이 더 컸다.

혼란 속에서 수립된 남한 단독정부

소련군정은 1946년 1월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평남지역 건준위원장이며 기독교계 정당 조선민주당의 총재였던 조만식을 1차 연금했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한 후, 7월 22일 4개 정당과 13개 사회단체가 모여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8월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11월부터 시작된 인민위원회 선거를 거쳐 1947년 2월 첫 인민위원회를 소집해 자치정부로 역할을 했다. 


경제정책으로는 1946년 3월부터 무상분배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8월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과 친일파가 소유했던 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런 정책들을 바탕으로 지배 체제를 확고히 했다.


남쪽은 미군정이 1946년 5월부터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전면화했고 조선공산당도 미군정에 맞서는 신전술을 펼치면서 유혈사태가 계속 이어졌다. 조선공산당을 배제한 좌우합작 시도는 실패했고 급기야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한다. 미군정 아래 경제정책 역시 북과 달리 적산불하 과정에 비리결탁이 심했다. 농지개혁도 실패하고 식량문제가 연이어 대두됐다. 이런 상황은 미군정의 탄압에도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가 줄지 않는 이유가 됐다. 그리고 UN에서 1947년 11월 4일 남북총선거가 결정된 후 정치적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미국은 1,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모두 결렬된 후 자국의 입김이 강했던 UN으로 공을 돌렸다. UN 총회는 1947년 9월 23일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한 후 빠르게 총선거를 결정했는데 조건은 ‘UN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UN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8일 도착했다. 그러나 소련군정은 위원단의 조사를 반대했고, UN은 2월 26일 소총회를 연 뒤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 선거를 결정한다. 

 

▲ <부산일보> 1947년 10월 31일 ‘UN총회 미소대립 심각... 진정한 조선대표는 누구?’


남한 단독선거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1948년 2월 7일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총선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이 파업에 호응해 전국 곳곳에서 미군정 경찰과 유혈 충돌을 일어났다. 이는 1946년 대구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된 10월 민중항쟁과 달리 계획된 사건이었다. 전체 참가자가 약 200만 명이었으며 사망자가 100여 명, 투옥된 자가 8500명 정도로 추산될 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민족주의 계열도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이 이른바 ‘7인 지도자 공동 성명’을 발표해 ‘남북 형제간 유혈극이 벌어질 것’을 경고했다. 


“우리의 보는 바로는 남북의 분열 각립(各立)할 계획이 우리 민족에 백해(百害)있고 일리 없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쪽이나마 먼저 수립하고 그 다음이 반쪽에서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반쪽 통일이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할 뿐일 것이다.”-<심산 김창숙평전>(시대의 창, 2017) 중


이런 경고는 제주 4.3민중항쟁을 시작으로 점점 사실이 돼갔다.
 

▲ 제주 4.3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된 1948년 3월 1일 단독선거 반대 시위와 유혈진압(강요배 그림)


남한 정부 수립 후 3개월, 국가보안법 제정

1948년 4월에 시작한 제주항쟁 후 10월 여수시 주둔 14연대가 제주 파병 명령을 거부하며 시작한 무장반란이 벌어졌다. 제주 민중항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면서 14연대 파병이 결정됐다. 10월 15일 육군총사령부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그런데 파병을 앞두고 출병환송회가 열리던 10월 19일 밤 지창수를 중심으로 출병을 거부하며 반란이 시작됐다. 이때 14연대 안에는 남로당 계열 장교와 병사들이 다수 있었지만 사전 계획된 것이 아니라 내부 피해도 발생한다. 그러나 상황은 벌어지고 진압군이 출동해 대지하며 27일 여수에서 밀려날 때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입장은 아래 성명과 같다.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애국인민에게 호소함’, 병사위원회, <여수인민보> 1948년 10월 24일


‘국가보안법’은 여수·순천사건을 이유로 긴급하게 만들어져 1948년 12월 1일 제정 공포됐다. 법리상 미비점들도 다수 지적됐다. 당시 법무부장관도 국가보안법을 급하게 제정하느라 기존의 치안법령과 의용형법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못했다고 시인할 만큼 서둘러 제정했다. 


국가보안법 제정에 앞서 이뤄진 국회 토론을 보면 처음부터 법조항이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과 유사한 사상탄압 문제가 지적됐다. 그리고 법조문이 ‘집회・결사・양심의 자유’라는 헌법 조항과 충돌하고, 문구도 모호하고 실제 적용도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후 사회주의 계열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1949년 한 해에 국가보안법으로 검거 투옥된 사람이 11만8621명에 달했는데 1948년 말보다 다섯 배가 늘어났다. 같은 해 9~10월 사이에 132개의 정당・사회단체가 해산됐다. 


국가보안법의 구체적 해석과 운용지침은 1948년 12월 27일 전국검찰감독관 회의 자료 제출 당시 사상검사 오제도가 작성한 서울지검 ‘자문답신안(諮問答申案)’을 보면 명확해진다.

사상범(思想犯)과 그 용의자에 대한 사전사찰제도(事前査察制度)의 확립
②중점적극수사체제(重點積極搜査體制)의 확립(確立)
③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한 감염을 예방하고 반국가분자(反國家分子)를 뿌리 뽑기 위해 엄벌주의로 그 형(形)을 통일할 것
④엄벌과 동시에 사상(思想)의 시정(是正)으로 공산당(共産黨)이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전위대(反共前衛隊)로 내세울 수 있는 교화전향(敎化轉向)운동을 적극 펼 것
⑤공소보류처분제(公訴保留處分制)를 신설, 전향가능자와 죄상이 경미한 자는 일정기간 책임감독자에게 보증인수케 하고 사상을 선도해서 감시했다가 재범의 위험이 없을 때 관용할 것

오제도는 1917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와세다대 법과를 졸업한 후 1940년부터 신의주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광복 후 월남해 1946년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합격했던 대표적인 사상검사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1949년 4월 보도연맹 창립을 주도했다. 국가보안법을 바탕으로 ‘공산당이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전위대를 만들기 위해 전향운동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런 발상과 전개는 앞서 살펴본 일제강점기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제정되고, 1937년 ‘사상보국연맹’이 만들어진 순서와 거의 판박이처럼 흡사하다. 


오제도 뿐 아니라 보도연맹의 창설을 주도한 이들은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사상검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사상범’을 체포하고 관리했던 친일전력의 검찰과 경찰 출신이 해방 후 다시 중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도연맹의 등장

2005년 12월에 출범한 ‘대한민국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도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한 인물들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최초 제안자 오제도 검사를 비롯해 검찰에서 보도연맹 결성에 관여한 인물은 대검찰청 차장검사 옥선진, 서울지검 검사장 이태희, 서울지검 차장검사 장재갑, 서울지검 검사 정희택, 선우종원 등이다. 경찰은 결성 준비 초기 참여한 서울시경국장 김태선과 서울시경 사찰국장 최운하다. 주요 인물들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경력은 표와 같다. 

 


보도연맹은 사상검사들이 설계한 밑그림대로 1949년 4월 15일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됐고, 4월 20일 서울시경찰청 회의실에서 창립식을 거행했다. 다음날 기자회견이 열렸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는 보도연맹 결성을 알리는 소식과 함께 결성 목적을 담은 취의서도 함께 실려 있다. 

 

▲ <동아일보> 국민보도연맹 결성 기사와 ‘취의서’ 1949년 4월 2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남로당의 멸족정책으로 이상과 같이 탈당 전향자가 속출하나 차등 전향자, 탈당자를 철저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으로서 멸사봉공의 길을 열어 줄 포섭기관이 절대로 요청되는 바 여사한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나머지 고인은 천학미력을 무릅쓰고 결사보국의 전성일념에서 취히 전향자 국민보도연관을 기성(期成)하고자 하는 바이다.”


취의서 내용을 살펴보면 보도연맹을 결성한 이유가 정치사상범의 전향을 받아줄 포섭단체가 필요해서임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앞세운 인물이 박우천이다. 박우천은 당시 43세로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전선, 신간회 동경조직 부책임자, 노동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70여 회 검속을 당했다고 한다. 박우천은 보도연맹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아래 기구 표처럼 상위 임원은 국가기관에서 맡아 검찰과 경찰이 운영하고 전향자 중 일부에게 간사장 지위를 줬다. 


보도연맹 결성을 가속화 시킨 두 번째 이유는 사상범 체포가 급증하면서 생긴 수용 문제 해결이었다. 국가보안법 제정 후 너무 많은 체포와 구속이 이뤄졌고 형무소를 신설해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처벌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됐다. 


실제로 정부의 대대적인 좌익 색출 결과, 단독정부 수립 후 1년도 되지 않은 1949년 4월 30일까지 8만9710명이 체포됐다. 그 중 2만8404명이 석방됐고 2만1606명이 기소됐다. 나머지 2만9284명은 내무부 치안국으로, 6985명은 헌병대로 송치됐으며 그 외 1187명이 미결상태로 형무소에 수감됐다. 


기소된 사람들은 80% 이상 유죄선고를 받았다. 결국 전국의 수용소는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으로 가득 차게 된다. 1948년 12월 당시 법무부차관이 ‘형무소 수용능력이 1만5000명인데 수감돼 있는 인원은 4만 명’이라고 밝힐 만큼 심각했다. 수감자가 급증하자 대부분 수용능력 2배 이상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당시 국회에서 논란이 될 정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수감자의 약 80%에 달할 만큼 폭주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수용하기 위해 1949년 10월 27일 추가로 부천형무소와 영등포형무소를 신설했지만, 이것으로도 늘어나는 수감자를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또한 검찰과 법원의 업무도 폭주해 수사와 재판 업무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도연맹은 이런 상황을 반영해 전향자를 수용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거기에 맞춰 국가보안법도 제정 6개월 만에 재개정에 들어가 제정 1년 만인 1949년 12월 19일 전부 개정된다. 개정 이유는 모두 7개인데 다음 5, 6항이 보도연맹과 직접 연결된다.

⑤사상범죄자 중 자기의사에 의하지 않고 이 법이 정한 결사나 집단에 참여한 자는 교화시켜 선량한 국민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보도구금을 할 수 있도록 함.
⑥보도구금 중에 있는 자로서 재범의 우려가 없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법무부장관은 석방을 명할 수 있도록 함
- 국가법령정보센터 ‘국가보안법’ 법률 제85호 1949년 12월 19일 전부개정


▲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출처: 한지희 석사 논문 <국민보도연맹의 결성과 성격> 1995)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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