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의 시대적 배경 (2)

김승석 울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기사승인 : 2019-05-15 08: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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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묵자 읽기

춘추시대에는 대부(大夫)의 권위가 지속적으로 강화됐다. 대부(大夫)들은 제후의 지위를 대체하려고 군주를 사살하는 일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춘추시대 후반기에는 제후들의 겸병전쟁보다 제후국 내부의 대부(大夫)들 사이에 세력싸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진(晉)나라가 삼분(三分)되었고, 제(齊)나라는 강씨(姜氏)를 대체하여 전씨(田氏)가 정권을 잡았으며, 노(魯)나라에서도 삼환씨(三桓氏)의 권력 다툼은 잘 알려져 있다.


제후들과 대부들의 겸병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국시대에는 생존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최우선과제로 등장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각국은 변법개혁(變法改革)을 단행했다. 변법(變法)의 핵심은 주(周)나라의 세습적인 분봉제도(分封制度)를 점차 중앙집권적 군현제(郡縣制)로 대체하는 데 있었다. 문화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진(秦)나라가 변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해 후에 중국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진(秦)나라뿐 아니라 각국의 왕들은 세습 대부들에게 통치를 위임하기보다는 지방관을 파견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러한 경향은 말단 귀족들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했다.


부국강병과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능한 인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제후와 대부들은 선비들을 모으고 대접해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됐다.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등이 3000명의 식객을 거느렸다는 사실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잘 알려주고 있다. 능력과 경륜만 인정받으면 혈연과 관계없이 중용됐으며, 유능한 인재 역시 자신이 봉사할 지도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혈연에 의한 정치권력의 세습이 약화되고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이 ‘사(士)’계급을 형성하면서 그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세습 제후세력이 약화되고 지주, 상인, 수공업자 등 신흥세력이 성장하면서 ‘형벌은 대부(大夫) 이상에서 행해지지 아니하고, 예(禮)는 서민(庶民) 이하에서 행해지지 않는다’는 낡은 관행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철기의 보급은 농기구와 더불어 무기의 성능을 크게 향상시켜 전쟁의 양상을 격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춘추시대에는 대부(大夫)와 무사(士) 등 지배층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전차전(戰車戰)이 일반적이었다면 전국시대에는 하층민이 대규모로 동원되는 보병전의 형태로 전쟁의 모습이 바뀌었다. 동시에 농민이 전쟁에 동원되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나,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비축으로 일정한 정도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장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발생했다. 또한 춘추시대에는 읍성(邑城)국가로서 그 규모가 대단히 작았으나, 전국시대에는 영토국가로 바뀜에 따라 정복전쟁으로 인한 실리가 증가되었다는 점도 천하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수행하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리하여 전국시대의 전쟁은 춘추시대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커지고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정복전쟁은 백성을 죽음의 공포와 기아로 몰아넣고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다른 제자백가와 마찬가지로 묵자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목도했으며,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주장하는 <묵자(墨子)>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다.


김승석 울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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