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직거래와 유통 사이에 있어야 할 것

이근우 시민, 농부 / 기사승인 : 2020-03-25 0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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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

농산물 유통과 관련해 좀 거창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농산물 가격하락과 변동성 증가는 유통구조의 문제이고 비효율적인 유통구조와 유통 상인들의 독과점적 지위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단순화하는 것이 농산물의 안정적인 가격과 유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역대 정부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유통의 단순화, 다시 말해 직거래 방식으로의 전환은 유통비용이 생산자에게 전가돼 비용이 상승하는 부작용이 따르게 됩니다. 효율적이고도 신속한 가격 결정의 저해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구조적 측면이 아니라 유통조성 기능을 매개로 농산물 유통의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 봄 채소 씨 넣기


농산물 유통에는 대표적으로 구매·판매의 거래기능인 상적 유통기능과 저장·가공·운송 및 도매시장 등 유통기반시설인 물적 유통기능이 있는데, 이 두 기능을 원활히 해주는 지원기능이 유통조성기능입니다. 유통조성기능은 공적 기능으로 정부와 공공기관이 수행하게 됩니다. 유통조성기능의 핵심은 표준화 기능(품질 격차 조정, 원활한 생산 활동), 위험부담 기능, 시장정보기능, 금융기능 등입니다. 정부 투자기관인 농수산물유통공사가 물류 표준화 조사, 연구 및 보급확대 그리고 유통정보 전파, 포장센터 및 도매시장 등 유통 경영체 지도, 지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유통조성기능이 성공적이려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측시스템과 정보시스템을 갖춰야만 합니다. 이를 토대로 농산물선물거래소가 설립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제가 서두부터 거창하지만 따분한 개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제 사소하기 짝이 없는 농산물 직거래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제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앞에 든 거창한 유통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상이 일개 농가의 직거래 방식에서도 일어납니다. 소농의 직거래 활성화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에 거창한 개념들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추야, 어서 자라라


귀농 초기, 우리 부부는 마을의 농산물을 도시에 대신 팔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농민들이 의존하는 농산물 경매장의 가격이 워낙 낮았고, 마을을 방문해 수매하는 중간 상인들 역시 시장시세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농산물을 거둬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중간 단계를 없앰으로써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가격을 결정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마을 농민들께서 가격 결정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대도시로 팔려나갈 것을 아는 그들은 서울에서 판매되는 가격에 팔겠다고 했습니다. 소비자의 택배비 부담까지 고려하면 더 비싸지는 셈입니다. 설득이 필요했습니다. 이듬해도 공판장 시세와 무관하게 안정적인 값을 받기 위해서는 현시세보다는 낮은 가격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간단했습니다. “내년 일을 어찌 아누?” 우리 부부는 잠시 분개했습니다. 수십 년 농사를 지은 분들이 매년 한해살이를 해왔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습니다. 포기하려는 순간, 아내가 말했습니다. “내년에 보자!” 일단 농민들의 가격 결정을 존중해서 팔되 내년에는 올해를 근거로 다음 해의 가격 결정권을 빼앗자는 전략이 세워진 것입니다. 문제는 소비자 쪽에서도 생겼습니다. 가격과 품질은 물론 재배방식까지도 따지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에 대한 신뢰만으로는 마을 농산물을 믿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경험이 없는 우리 부부는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 비닐하우스에서 먼저 자라는 봄


사실, 이웃 농민들의 농산물을 대신 팔아주자는 우리 부부의 생각에는 또 다른 함의가 있습니다. 우리 농산물의 직거래와 관련해 품목 다양성을 연중 유지함으로써 우리 고객들의 주목도를 장기간 지속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 이웃 농민들 모두에게 득이 되는 전략이라고 믿었습니다. 일종 규모의 직거래 시장이 형성된다면 시장의 활성화나 확장성에서 매우 유리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시작부터 삐걱댄 것입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발생하는 이해관계에 둔감해서 생긴 일입니다. 물론 직거래 특유의 유통방식 연구가 부족해서 그렇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마을 농산물 직거래 대행을 어렵사리 몇 해 이어가다가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마을 농산물이 양파, 대파, 감자, 콩 등으로 단순화됐기 때문에 팔 것이 없는 지경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우리의 농업구조가 지극히 편협해진 결과입니다. 우리 마을에 국한해 말한다면, 결국 농업은 생산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죠. 씁쓸한 현상입니다.


농산물 직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자에 대한 신뢰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소비자의 직거래 구매심리를 결정하는 요인에는 가격, 신선도, 품질, 수월성, 친분, 신뢰도 등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반적으로 위에 적은 순서대로, 가격이 구매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인 것 같습니다. 이를 거꾸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이들 요인의 순서가 무작위로 바뀌는 상황도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소비자는 가격에 가장 민감합니다. 이는 순수한 이해관계입니다. ‘싸고 질 좋은 것’은 일반 소비자의 좌우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가격은 절대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가격은 질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저렴하다고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수월성이나 친분, 신뢰도 역시 구매 결정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게 됩니다. 친분이나 신뢰도가 품질을 보증할 수도 있고, 수월성이 품질에 우선하는 결정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소비자의 종합적인 판단은 항상 합리적인 가격에 맞춰져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필요한 것이 중재자입니다.

 

“사실 지금 비핵화 협상에서 한국의 역할에 대한 진정한 의문은 ‘중재자 개념’이 아니라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가’일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국의 중재 역할은 북한을 설득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말발이 서야 하는데, 그것은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해 축적한 상호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이종석, ‘이종석 칼럼’ 북핵 중재자의 조건, 남북관계의 자율성, 한겨레신문) 다소 엉뚱한 인용입니다만, ‘역량’과 ‘축적한 상호신뢰’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부부가 마을 농산물을 대신 팔기 위한 선수 조건이었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부부는 사는 지역에서 철 따라 나오는 농산물이나 과일 등을 시시때때로 직거래 대행을 하고 있습니다. ‘역량’이 부족해 기존의 고객을 잃기도 하고, ‘축적’된 ‘신뢰’가 없어 오해받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고객 서비스 전반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수월성에 이르지 못하는 때도 많습니다. 다행인 것은 비록 조그만 규모의 직거래 장터지만,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여하는 농가는 가격등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시장을 통해 생산한 일부 농작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팔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다양한 제철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채널이 있어 만족할 것으로 추측합니다.

 

▲ 마늘 새싹, 하늘 찌르겠네


우리 부부는 이 과정에서 맡은 역할을 중재자로 이해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이해관계에서 잠재적인 갈등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중재자는 원한다면 누구나 될 수 있지만, 그 역할에 충실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크다고 ‘말발’이 서는 게 아니라서 내실 있는 역량을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바깥에서 그것을 조정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은 무척 고되고 시간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유통조성기능이라는 것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관측시스템과 정보시스템’의 부재는 임의의 중재자가 하는 직거래 유통을 어렵게 합니다. 농작물 생산과 수확의 시기나 지역적 편차, 빠르게 변화하는 추이 등을 정확히 읽어낼 수 없어 합리적인 가격 결정과 농산물의 품질 예측에서 굼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농산물 직거래에 중재자가 필요한 것은 아무도 농산물의 적정한 가격을 지지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산물 직거래는 자구책입니다.


이근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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