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석대들에서 동학농민군 산화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5-15 08: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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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1894년 장흥의 동학 열기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전라도 각지에서 동학의 교세가 확장됐다. 장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흥의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김재계(金在桂)는 1894년 당시 7세로 아버지를 따라 동학혁명에 참여했다. 김재계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1934년 <천도교회월보>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1894년 봄 장흥의 동학 열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갑오년은 이제로부터 사십 년 전이다. 내가 일곱 살 먹던 그해다. 그해 봄부터 우리 마을에는 더욱 동학 열이 심하여 집집마다 청수단을 만들고 낮이나 밤이나 주문 소리가 흡사 글방에서 글 읽는 소리 같았다. 우리 어린 사람들도 삼삼오오 작반(作伴)하여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노래 부르는 것 같이 외우고 다녔다. 하루는 들리는 말이 접주 이인환 씨가 거정리 벌판에서 동학대모임을 한다고 한다. 어른은 물론이거니와 부인 아동들까지도 구경을 간다고 한다. 아버지도 가시고 삼촌도 가시고 할머니도 가신다고 한다. 나도 가겠다고 선두에 나와 섰다. 아버지 삼촌 할머니는 어린애들이 가면 사람 많은 속에 큰일 난다고 절대로 만류하시다 그래도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다가 삼촌에게 호령까지 듣고 어머님의 손에 붙들려서 도로 들어갔다. 이 모임이 있자 사방에서 들리는 말이 접주 이인환 씨는 조화가 비상하여 앉아서 십여 장 되는 나무를 이리로도 뛰어넘고 저리로도 뛰어넘고 용도 되고 범도 되고 또 고읍면 송현리 등지에서는 시녀(侍女)가 나고 대선생이 나고 해서 뭇사람으로 하여금 개수정 돌바위 밑에 용천검이 있고 갑옷이 있으니 파라고 해서 날마다 사람이 구름 모인 듯하였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 또 한편에서는 소를 잡고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고 참으로 동학의 기분이 굉장하였다.

이렇게 동학의 열기가 왕성한 장흥으로 각지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모여들어 재기를 도모했다. 이방언, 이인환, 이사경, 백인명, 구교철 등 장흥의 대접주들은 이들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강진현, 벽사역, 장흥부, 강진병영을 점령했다.

 

▲ 장흥 석대들. 1894년 12월 15일 이곳에서 이방언, 이인환 등이 이끄는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이로써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항전이 끝을 맺었다. 사진의 왼쪽 아래 주차장 위에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있다. 주차장과 기념탑 일대가 석대들 전투에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다.(출처: 장흥군청)

일본군과 관군, 장흥으로 집결

12월 10일 강진병영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영암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으로 철수했다. 벽사, 장흥, 강진병영이 동학농민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급보를 접한 후비보병 독립제19연대 대대장인 미나미 소지로(南小西郞)는 즉각 강진과 장흥 일대로 병력을 파견했다. 나주에 대대본부를 두었던 미나미는 일본군과 관군을 세 갈래로 나눠 강진, 영암, 보성, 능주 지역을 지나면서 동학농민군을 토멸시키고 장흥으로 들어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미나미는 토벌 도중에 동학의 대접주를 잡으면 살해하지 말고 자신이 있는 나주의 본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나주에서 세 갈래로 출발한 일본군과 관군 가운데 제일 먼저 이시쿠로(石黑光正)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교도중대가 영암을 거쳐 12월 12일 병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동학농민군은 병영에서 철수한 뒤였다. 다음으로 일본군과 통위영군으로 구성된 부대는 11일 나주를 출발해 능주를 거쳐 12일 새벽에 장흥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시라키(白木誠太郞)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교도중대는 원정을 거쳐 15일에 장흥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장흥으로 집결한 일본군과 관군의 수는 관군 120명, 일본군 250명으로 총 370명 정도였다.


장흥과 강진의 동학농민군이 기포해 승리를 거두자 인근 영암의 동학농민군도 1천 명 정도 기포해 장흥과 강진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했다. 이들은 영암군수 남기원과 수성장 하태명을 굴복시키려 했으나 12일에 이시쿠로 부대가 병영에 들어오자 포기했다. 또 해남의 동학농민군도 장흥과 강진의 동학농민군이 병영을 함락시키자 고무돼 12월 18일에 기포했다. 이들은 이튿날인 19일 새벽에 해남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8일 저녁 일본군과 통위영병이 해남으로 들어오자마자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8~9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에 해남의 동학농민군은 해산해 장흥으로 합류했다.

 
병영에서 철수한 동학농민군은 두 지역에 나누어 산개했다. 장흥 동학농민군의 주력인 이인환, 이방언 부대는 남면 어산촌에 주둔했고, 나머지는 장흥 남문 밖 건산 모정 등에 주둔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의 전투는 12월 13일 남문 밖 조양(朝陽) 전투부터 시작됐다. 일본군과 관군이 13일 새벽에 남문 밖을 탐문하니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군과 본영 병정 30명이 합세해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니 동학농민군은 몇 차례 교전 후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해 20여 명을 포살시켰다. 화력이 약한 동학농민군은 제대로 대응해보지도 못하고 흩어져 남면 어산촌의 본진으로 후퇴했다.

 

▲ 장흥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동학대접주 초상화. 웅치대접주 구교철, 관산접주 김학삼, 남면대접주 이방언, 부산대접주 이사경, 대덕대접주 이인환의 초상화가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외에 유치대접주 문남택, 강진대접주 김병태도 장흥 동학혁명을 지휘했다.(출처: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통한의 석대벌 전투

조양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해 어산촌으로 몰려오자 이인환과 이방언 대접주를 위시한 지도부는 숙의 끝에 15일 새벽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또 지도부는 병력 보강을 위해 보성과 해남, 영암의 동학농민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전라남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장흥으로 집결해 동학농민군의 수는 3만 명에 육박한 대부대가 되었다.


15일 아침 동학농민군 선발대는 장녕성 북서쪽 산봉우리 일대를 차지하고 선제공격에 나섰다. 당시 일본군 2개 지대 200명과 관군은 30명은 장녕성 안과 남문 옆 남산 봉명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선제공격으로 일본군과 관군이 수세에 몰리자 강진으로부터 온 시라키 중위가 일본군 60명과 교도대 30명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리고 민병을 출동시켜 동학농민군을 산림지대에서 석대들로 유인했다. 석대들로 동학농민군의 본진이 이동하게 되자 전세는 금세 역전됐다.


우수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동학농민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화승총과 창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쪽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석대들에서 2시간 가까이 동학농민군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양쪽에서 전개해 오는 일본군과 관군의 월등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은 갖고 있던 대포 4문과 회룡창 1자루를 회수하고, 활과 화살, 총탄, 화약 등은 모두 불태웠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후퇴하면서 송정리와 자울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4시간 가까이 저항하는 가운데 날이 저물어 전투가 중단됐다. 이날 석대들 전투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정도로 동학농민군은 큰 패배를 당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김재계는 아버지로부터 이렇게 들었다.

이번 보성, 장흥, 강진, 강진병영을 함성(陷城)하고 도로 남면 어산 앞에 와서 유진하고 있는데 본읍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경군과 일변이 본읍 남산 봉명대에 유진하고 있다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수십만 군중은 일시에 더욱 흥분하여 기세를 올리며 바로 석대평으로 남산을 직충할 때 석대평을 거의 지나자 선군이 퇴진을 할 새 막아놓았던 큰물이 일시에 터지는 것 같이 사람의 물결은 말할 수가 없이 서로 남으로 동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십 리 밖에까지 총알이 비 오듯 전후좌우로 참벌 우는 소리가 나며 사람은 옆에서 앞뒤에서 턱턱 꺼꾸러진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 산을 넘어 산으로 산으로 해서 어제 밤 자정 후에 집으로 들어오셨다.

수적으로 많은 동학농민군이었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기 위한 전술을 갖추지 못해 수만 동학농민군이 석대들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다 패배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스나이더 총소리에 정신이 빠져나갈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갈팡질팡했다.

 
날이 어두워 전투가 끝나자 동학농민군은 장흥읍에서 남쪽으로 40리 가까이 떨어진 고읍 대내장[죽천장(竹川場), 옥산(玉山)]으로 후퇴해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3만 명에 이르던 동학농민군도 4~5천 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장흥의 석대들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17일 오후에 옥산으로 들어와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면서 대항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이 대오를 정돈하고 일제히 공격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은 고읍천을 사이에 두고 3~4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월등한 화력에 동학농민군은 견디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흩어졌다. 옥산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포살된 동학농민군이 1백 명이었고, 생포된 20명 가운데 10명은 그 자리에서 학살됐다. 옥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해남과 진도 쪽으로 피신했으며 대흥 대접주 이인환을 비롯한 강진군의 동학농민군은 천관산 등 산중으로 피신했다. 이 옥산 전투의 패배로 전라도 일대 동학농민군의 항쟁도 막을 내렸다.

 

▲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1991년 장흥의 동학농민군 후손들이 중심이 돼 건립했다. 이 기념탑은 장흥의 석대들 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세웠다.


장흥의 동학농민군 가운데 출중한 인물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여장군 이소사(李召史, 이조이)가 있다. 이소사는 당시 22세의 나이로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는데 경국지색의 미모라고 일본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이소사의 활약에 사기가 크게 진작됐다고 했다. 동학농민군이 장흥부를 함락하고 부사인 박헌양의 목을 이소사가 쳤다고 할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였다. 이소사는 옥산 전투에서 붙잡혀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의 살이 문드러졌다고 했다. 나주로 압송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년장수 최동린(崔東麟)도 장흥 동학농민군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최동린은 장흥의 대흥면 출신으로 13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다 석대들에서 일본군에 체포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돼 12월 28일에 처형됐다. 장흥에는 최동린 이외에도 15세로 참여한 대흥면 연지리의 김유선(金有善)과 약산면 해동리의 박백환(朴白煥) 등이 있었다.

 

▲ 장흥 고읍천. 이 내를 사이에 두고 장흥의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장흥의 옥산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라도 동학혁명은 끝이 났다. 이후 대대적인 동학농민군 소탕 작전이 전개됐다.(출처: 장흥군청)

그리고 장흥의 동학혁명과 관련해 유명한 인물로 소년 뱃사공 윤성도가 있다. 석대들과 옥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 소탕을 위해 대대적인 수색이 펼쳤는데 당시 이를 피해 장흥의 회진면 덕도(德島)에 약 500명의 동학농민군이 피신해 있었다. 수색이 덕도까지 좁혀오자 윤성도는 한밤중을 이용해 덕도의 동학농민군을 금당도와 생일도, 약산도 등 다른 섬으로 피신시켜 동학농민군을 구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이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해 전라도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인환, 이방언 등 대접주들의 역량과 함께 이소사, 최동린 등 특출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그리고 윤성도와 장흥 백성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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