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 기사승인 : 2020-03-26 0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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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코로나19 때문에 ‘평범하게’ 누리던 일상의 가치를 절실히 느끼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전 인류에 닥친 비상사태에서도 인류애를 잃지 않고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행하는 각인의 숭고한 노력에 알맞은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 좋을까. 단연 연대일 것이다. 급증하는 확진자를 돕기 위해 한달음에 대구와 경북 지역으로 달려간 의료인들, 취약계층 의료 지원을 위한 성금, 마스크 품귀 현상에도 이어지는 마스크 기부 등 따뜻한 소식들로 연대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작년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가 윤이형은 이상문학상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절필을 선언했다. 대상, 우수상 수상작품의 저작권 3년 양도, 수상작을 다른 작품집의 표제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조항은 작가가 착취당하는 구조임에도 관행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불공정 관행을 시정하기 위해 한 작가가 절필 선언까지 해야만 하는 문학계의 폐쇄성과 비합리성은 문학계 미투로 일찌감치 짐작해 온 바였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 최영미 <다시 오지 않는 것들> ‘괴물’ 중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내가 좋아하는 황정은, 권여선, 정세랑, 구병모, 백수린 등의 작가를 포함한 50여 명이 문학사상사 보이콧에 동참한다는 연대의 뜻을 보였다. 아마도 거대 기성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연대일 것이다. 보이콧에 동참하는 작가들의 위치와 입장은 저마다 다를 것이지만 기존의 부당한 관행(폭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윤리성에 기반한 결합, 연대, 우정은 운동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된다. 


최근 페미니즘 운동의 가장 큰 화두는 운동 주체로서 단일한 “여성”을 상정할 수 있느냐다. 여성 차별과 억압이라는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으로 결집하는 것은 운동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다양한 위치의 여성들을 단 하나의 “여성” 정체성으로 묶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어떤 여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를 들어, 중산층 백인 여성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흑인 및 제3세계 여성의 고통을 대변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페미니즘은 갈등과 반목 속에서 휘청휘청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는 형상을 하고 있다. 꼴페미/개념녀, 가짜/진짜 페미니스트로 이분화된 도식이 백래시로 등장하는 배경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붕대 감기>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젊은 여성과 늙은 여성, 기혼여성과 비혼여성, 꾸밈노동을 거부하고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이와 탈코르셋이 또 다른 여성 억압 규범이 되리라 우려하는 이들. 작가는 나이, 직업, 취향, 기질 등이 서로 다른 다양한 여성들의 갈등을 ‘자매애’로 봉합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여성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페미니즘 내부에 공존하는 다양한 입장과 시선을 드러낸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로 여성들의 우정은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그 해답은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규탄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통해서.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느슨하고 유연하게 결집하는 수많은 여성의 운동 방식에 이름을 붙인다면 단연 페미니즘일 것이다. 여남 대립구도가 아닌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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