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이 무력 진압 되고, 정판사 재판은 검찰의 조작 명백

배문석 / 기사승인 : 2022-01-19 00:00:14
  • -
  • +
  • 인쇄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30)

10월 항쟁 시작은 ‘쌀 투쟁’과 경찰 발포로 사망한 노동자

미군정 통치과정에서 첫 대규모 항쟁은 10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터졌다. 그런데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전환과 함께 시작된 전평 총파업이 물결을 따라 일렁거리는 정도였다. 아침 일찍 대구역과 대구공회당 인근 주위에 노동자 수천 명과 부녀자, 어린이 등 1000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쌀을 달라”며 식량 배급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낮까지 이어져서 대구도청으로 집결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됐다. 오전 상황에 대해 전평 경북도위원회 간사였던 이일재는 자신이 참여했던 현장과 사건 배경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5년은 대풍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의 식량 정책의 실패와 식량 배급의 중단, 모리배의 사재기. 특히 대구에서는 호열자의 만연으로 외지와의 교통 중단으로 부황증은 물론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3월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된 기아 행진이 10월 1일에는 약 1000여 명이 대구시장을 만나 쌀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시장 권영세라는 자가 ‘살림 산다는 여편네들이 양식 단도리를 그렇게도 못해 밤낮 소란이냐’라는 말을 했다. 군중들은 시장실을 점거하며 항의농성을 하다가 오후에는 도청으로 장소를 옮겨 연좌시위를 했습니다.”


그러자 미군정 경찰이 시위 장소를 포위하고 위협하면서 대치 국면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경상북도 경찰청장이었던 권영석은 무장 경찰 60명을 끌고 나타나 해산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이 상황은 불이 붙은 군중을 향해 휘발유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위는 계속됐고 해가 질 무렵에는 대구역 앞에서 운수노동자들과 운수경찰이 충돌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경찰 일부는 성난 군중들에게 붙잡혀 다치기도 했다. 그때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총탄에 노조지도자 이상익과 신원 미상의 노동자 1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이렇게 2명이 사망한 사실은 당시 미 24군단 사령부 감찰참모실에서 작성한 문서에 기록돼 있다. 아울러 같은 문서에는 이 발포사건이 ‘대구 10월 사건’이 시작된 계기라고 적고 있다.
 

▲ 1946년 10월 4일 <조선일보> 대구에 일대 불상사

10월 2일부터 항쟁은 각지로 번져가, 12월까지 산발 진행

10월 1일 밤 경찰 발포 이후 10월 2일부터 시위는 항쟁으로 번졌다. 항쟁 둘째 날이 되면 오전 8시부터 대구역 앞에 수천 명이 무장 경찰과 대치한다. 학생 시위대는 노동자 시신 한 구를 들것에 메고 대구경찰서 앞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고, 급기야 대구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점령당할 때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일부 군중은 미군정 관료나 부호의 집을 공격해 몰수한 식량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무장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이 사이에 민간인 사망자가 18명까지 속출했지만 경찰도 4명이 사망한다. 결국 오후 3시 미 전술군이 대구 시내에 투입돼 강력한 무력 진압으로 이어진다. 미군은 전차 4대와 기관총부대를 맨 앞에 내세웠다. 그리고 오후 5시 계엄령을 선포한다.


대구는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항쟁의 불길은 인근 지역으로 번진다. 대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시위대가 주변 군과 읍으로 옮겨가면서 경상북도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이 상황은 1주일 가까이 계속된다.
10월 8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기자들을 만나 대구를 비롯해 경남북 대부분의 지역에서 치안이 복구돼 정상상태가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도와 같이 경상도에서 멈추지 않고 전라도와 충청 일부 그리고 서울과 경기까지 불이 붙었다. 초기 대구처럼 폭발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산발적인 투쟁은 12월까지 이어졌다. 그럼 이 항쟁의 진상과 전개에 대해 당시 각 세력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 1946년 1월 8일 <경향신문> 전선의 치안은 복구, 대체로 정상상태

 

 


10월 항쟁 발생은 계획적? 우발적!

미군정은 공개된 입장과 언론에서 내부 감사보고서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미 24군단 감찰대는 경찰 발포로 터진 우발적인 사건이란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미 주둔군 사령관 하지와 미군정 장관 러취는 “외부 선동자, 일부 정당에서 의도적으로 벌인 파괴적인 폭동”이라고 단정 지었다. 애초에 미군정의 각종 정책이 실패해서 벌어진 배경과 친일파와 부역자 중심으로 꾸린 경찰에 대한 반발 등은 쏙 빼놓은 것이다. 이런 분석은 미군정과 호흡을 맞춰 온 이승만도 같았다. 이승만은 ‘매국적 적들의 선동’이라고 선을 긋고 살인, 방화, 강탈이 비인도적인 행동을 유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 안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박헌영이 월북을 준비하고 실행한 상황에서 ‘미군정이 원인’이란 목소리와 ‘박헌영과 간부파의 소아적 선동’이라는 내부 비판이 부딪혔다. 결국 한 쪽은 계획적인 폭동이라는 비난으로 상황을 설명했고, 다른 쪽은 미군정의 실정과 발포에 따른 우발적인 항쟁으로 입장이 나뉜 것이다.


그러나 월북한 박헌영과 북의 김일성이 보였던 태도를 통해 판단하면 이 상황은 정리가 된다. 두 사람은 시종일관 ‘10월 항쟁’을 확대하기보다 좌익 정당을 합당해 남로당과 북로당을 출범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기관은 10월 항쟁에 대해 오랫동안 ‘좌익 폭동’이란 붉은 딱지를 붙여 자발적인 민중항거와 민간인 학살을 외면해 왔다.


이런 왜곡된 평가는 다행히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1기 과거사위원회)가 2008년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바뀌게 된다. 2009년에는 유가족회가 만들어졌고, 1기 과거사위원회는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 대구와 경북지역의 민간인 학살과 10월 항쟁의 배경을 상세하게 다뤄 진상을 규명했다.


아울러 위령.추모사업,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역사기록 수정 및 등재, 평화인권교육 강화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화해 조치로 권고했다.
 

▲ <독립신보> 28회 공판 변론 “허위증거는 무너졌다. 민족적 양심으로 판결하라”(왼쪽). <공업신문> 28회 공판 최후진술 “피고들 사형 희망, 다시 한번 해방 기다릴 뿐”(오른쪽)

이관술 정판사 재판, 드러나는 검찰의 공소 조작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인민항쟁이 수많은 피를 뿌린 채 무력 진압되는 동안 정판사 재판은 검사 심리가 모두 끝나고 변호인단의 변론 공세로 전환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산발적인 항쟁의 여진으로 번지는 때였던 1946년 10월 24일 열린 25회 공판부터 28회(10월 31일) 공판까지 변론과 피고들의 최후진술이 이어졌다.


변론이 시작되면서 가장 핵심 쟁점은 검찰이 공소를 제기한 뒤 유지해온 “1차 위폐 인쇄 시기”와 조선정판사 사장인 박낙종이 같은 시기 서울에 부재(남부지방 여행)했고 이를 증명하는 다양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쟁점에 대한 피고들의 주장은 검사 심리 과정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검사 조재천은 기자들 앞에서 공소를 제기한 중요한 일정, 위폐 제작 공모와 시기에 대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제작 시기를 당기는 쪽으로 발언한다. 즉, 10월 하순에 첫 위폐 제작을 했다는 공소사실이 변호인들이 제출한 박낙종의 알리바이로 무너지자, 10월 21일부터 23일 사이라고 앞당겨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김창선이 송언필에게 처음 위폐 제작 제안을 10월 하순에 했다는 공소사실과 충돌한다. 또 그 제의를 보고 받은 이관술이 3일 뒤에 수락하자, 가담할 직공들을 선발해 제작했다는 시기도 꼬여버렸다.


왜냐하면 검사가 공소한 대로 위폐 제작을 제안한 10월 하순은 아무리 당겨봤자 10월 21일이다. 그런데 그때는 앞에서 1차 인쇄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관술의 수락과 고도의 실력과 작업시간이 필요한 위폐 제작을 하기엔 검사가 주장하는 타임라인은 도저히 말이 안 됐다.


10월 24일 25회 공판에서 변호인 김용암도 이를 정확히 지적한다. 신문 <민주중보>에 실린 기사는 10월 하순에는 박낙종이 김천과 진주에 갔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검사가 주장하는 또 다른 위폐 시기인 12월과 2월 역시 시기와 정황상 불가능하다고 변론했다.


이 쟁점을 시작으로 변론은 전 방위로 물꼬를 냈다. 한영욱, 오승근, 강혁선, 이경용, 백성황 등 변호인단은 이관술에 대한 부분은 모략이라는 변호사의 주장과 경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았다는 사실, 60일간의 유치 기간도 불법이라며 공소 자체가 문제 있음을 재차 지적했다. 10월 31일의 28회 공판을 끝으로 변호인단의 변론과 피고인들의 최후진술도 마무리됐다. 참고로 이관술은 10월 26일 열린 27회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했다.

 

▲ 1946년 10월 27일 <경향신문> 이관술 최후진술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