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 기사승인 : 2019-10-30 07: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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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화 ‘벌새’를 보지 못했다. 개봉 전부터 기대가 컸던 작품임에도 상영관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결과였다. 물론 울산 영화관들의 편협성도 한 몫 하긴 했다. 이런 이유들로 ‘벌새’ 시나리오를 읽게 됐다. 


김보라 감독은 영화 ‘벌새’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뼈대로 만들어졌지만 단지 나르시시즘으로 ‘내 거’가 아닌 원형적 서사를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했다(womankind vol.8 인터뷰 참고).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낸 여성이라면 ‘벌새’의 장면 곳곳에서 사적이지만 보편이라 할 수 있을 경험과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무척 성공적이며, 이 보편의 서사는 한국 사회를 넘어 확장의 가능성을 지녔음은 세계 각국 영화제 26관왕이라는 타이틀이 증명하고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90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필요 없는, 성장에 대한 집착적 열망의 상징이다. 이러한 야만의 시대는 일상의 폭력과 억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며,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희생과 침묵을 강요한다. 주인공 은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나 또한 일상의 폭력과 억압에 무감했고, 이해 받지 못했으며, 내 목소리를 갖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지숙이 은희에게 “너네 오빤 주로 어떻게 때리냐?”라고 묻는 장면에선 내 유년 시절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오빠가 없던 내게 친구는 “맨날 맞아. 지난번에는 술 마시고 토하는데 등 안 두드려 줬다고 뺨도 맞았어”라는 현실 오빠의 행각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고 구호를 외치게 하는 교실 장면에선 수업시간에 옆 친구와 속삭였다고 무릎을 꿇린 채 교과서로 사정없이 머리를 내리치던 수학 교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길을 걷다 부딪친 아저씨에게 뺨을 맞던 날에도, 경비 아저씨에게 젖꼭지를 꼬집혔던 날에도, 길거리에서 자신의 성기를 내 보이던 ‘바바리 맨’을 만났던 날에도 공포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혼자서 꾸역꾸역 삼켜야 했던 나의 유년기.


이런 은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건 “너 이제부터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같이 맞서서 싸워”라고 얘기해 주는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다. 아마도 영지에게 은희는 자신의 과거였을 것이며, 은희는 꿋꿋하게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내어 영지가 될 터이다. 나는 내가 은희의 시절을 지나왔듯 교실에서 만나는 많은 은희에게 위로가 되는 어른이 되고 싶다. 벌새의 날개 짓처럼 아등바등 삶을 살아 내는 어린 제자의 힘겨움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 


주로 강간‧살해당하는 젊은 여성 피해자 역할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가 주된 한국 영화계(2019.10.15. 경향신문 ‘분노남‧공포녀’가 채운 스크린 참고)에서 ‘벌새’와 같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와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 영화는 수많은 ‘은희’들에게 힘이 될 것이다.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우리집’의 윤가은, ‘메기’의 이옥섭, ‘아워바디’의 한가람, ‘82년생 김지영’의 김도영 등 여성감독의 모든 작품들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들의 타이틀이 ‘여성’감독이 아닌 감독이 되길, 여자 이야기가 아닌 인간 이야기로 불리길 바란다.


제솔지 페미니스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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